인공지능(AI), 자율주행,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4차산업혁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른 가운데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들 간 합종연횡(合從連衡)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세계 전자산업의 근간이자 기술적 토대를 쌓아온 반도체 기업과 IT 업체들의 전방위적인 인수합병(M&A), 파트너십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ARM을 중심으로 한 ‘반(反)인텔’ 전선이 뚜렷하게 형성되는 모양새다. 삼성전자는 ‘3D 크로스포인트’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령을 선언한 인텔의 뉴메모리 기술을 극복해야 한다. AI와 IoT를 노리는 ARM은 서버 칩 시장을 장악한 인텔의 철옹성을 넘어야 한다. 두 회사의 이해관계가 일정 부분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삼성전자와 ARM은 인텔이라는 ‘공공의 적’을 같이 견제하면서 협력을 통해 시너지(상승 효과)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확산의 1등 공신이 삼성전자였다는 점에 비춰볼 때 ARM의 구상하는 IoT 생태계를 강화하는 데 삼성전자가 큰 조력자가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또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ARM과의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뉴메모리, IoT, 자동차 등 미래 분야의 설계 라이선스를 확보할 경우 먼저 치고 나간 인텔과 퀄컴 등에 대항할 여력이 생긴다. 두 회사의 협력에 관한 큰 그림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직접 챙기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 뉴메모리 암투 시대, 삼성·ARM 손잡을 듯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를 35조원에 전격 인수한 직후인 지난 9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찾았다. 두 사람은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만나 장시간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손 회장과 이 부회장의 관계는 돈독한 편이다. 손 회장은 과거 이 부회장을 '오랜 친구'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삼성전자가 ARM으로부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비롯한 다양한 반도체 설계 라이선스를 구매하는 이 회사의 최대 고객사인 만큼 향후 3년 이상을 내다 본 전략적인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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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9월 서울 삼성 서초사옥에서 만났다.

그동안 모바일 AP 분야를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삼성전자와 ARM의 협력이 뉴메모리 분야로 확대될 가능성도 나온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기존의 주력 생산 품목인 D램, 낸드플래시 이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데이터 트래픽을 감당하는 뉴메모리 분야의 도약이 필요한 상황이다.

삼성전자의 최대 고객사인 ARM이 삼성전자의 뉴메모리 동맹군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 회사가 지난 수년간 소리소문 없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꾸준히 기술 경쟁력을 강화해왔기 때문이다. ARM은 CPU→D램 →스토리지로 이어지는 이른바 ‘폰 노이만 컴퓨터’ 구조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병목현상(Bottleneck)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대역폭 고도화 기술과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 기술 기반 등을 꾸준히 확보해 왔다.

특히 ARM이 보유한 비휘발성 메모리(Non-volatile memory: NV램) 기술은 전원이 공급되지 않아도 저장된 정보를 계속 유지한다는 점에서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와 맞붙을만한 뉴메모리 기술로 점쳐진다. 설계 구조가 비교적 단순해 집적도를 높여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처럼 고용량화도 가능하며 섭씨 200도 이상의 환경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내구성도 강하다.

ARM이 구상하는 NV램 제품은 마그네틱 램(M램), 코릴레이티드 일렉트론 램(Ce램) 등 뉴메모리 기술을 통해 구현된다. M램의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수년전부터 개발을 시도해온 기술로, S램이나 D램보다 용량을 10배 이상 늘릴 수 있고 압도적인 쓰기 속도를 갖추고 있다. 다시쓰기 횟수도 무제한이라는 특징도 갖고 있다. 자기저항메모리(ReRAM)의 일종인 CeRAM의 경우 칩의 설계 구조를 단순화해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ARM이 차세대 메모리 개발 컨소시엄인 'Gen-Z'를 공식 출범시키기도 했다. 인텔을 제외하고 세계 반도체 시장의 대형 기업들이 모두 가입한 이 컨소시엄은 ARM의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에 대항할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를 표준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ARM을 비롯한 AMD, IBM, 시높시스 등 설계 기술력을 보유한 비메모리 기업들이 뉴메모리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건 컴퓨팅 능력 향상을 위한 메모리 반도체의 구조를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이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삼성,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이 미래 메모리 시장에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기술적 흐름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재용와 손정의, 인공지능 IoT 전쟁에서도 우군으로 협력할 듯

11월 21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손영권 삼성전자 전략혁신센터 사장, 디네시 팔리월 하만 CEO, 박종환 삼성전자 전장사업팀 장(왼쪽부터)이 손을 잡고 협력을 다짐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자동차 전자장비 기업인 하만을 최근 9조4000억원에 인수했다.

삼성전자와 ARM이 협력은 인공지능과 IoT, 자율주행 등 미래 유력 사업의 반 인텔 전선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지금까지 드러난 두 회사의 전략을 종합해보면, 삼성전자와 소프트뱅크의 ARM이 추구하는 미래 전략 방향이 일정 부분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에 파트너로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ARM이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클라우드, 자동차, 모바일 기기까지 포괄하는 첨단 네트워크 생태계를 표방한다면 삼성전자는 이 생태계에 부품 솔루션과 핵심 디바이스를 제공하는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 청사진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퍼즐들이 더 많다. 우선 ARM은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근간이 되는 서버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현재 전 세계 90% 이상의 서버가 인텔의 x86 기반 칩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ARM의 점유율은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텔의 강점인 고성능 컴퓨팅(HPC) 분야에서도 ARM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ARM의 기술 포트폴리오가 저전력·모바일 반도체 기술 분야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ARM의 고성능 칩 설계를 직접 제품으로 뽑아낼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다. 업계 최초로 14나노 핀펫 생산공정을 선보였던 삼성은 최근 10나노에도 진입하며 관련 분야에서 성과를 쌓아가고 있다. 또 지난 수년간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최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비롯해 서버용 CPU, AP 등을 위탁 생산하기 위한 R&D 투자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그동안 직접 반도체를 설계하는 기술보다는 생산 공정 분야에 집중돼 있었던 삼성 입장에서 ARM은 천군만마같은 존재다. 삼성이 직접 개발하기 어려운 분야의 칩을 대신 설계해 중장기 연구개발이나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대한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손정의 회장은 지난 8월 ARM을 인수한 배경과 관련해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성’을 언급한 바 있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가 보고 듣고 만진 것 등의 데이터를 모두 학습한다는 얘기다. 그 데이터는 바로 ARM의 칩에서 발생한다. IoT, 자율주행 자동차 시대가 본격화 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고 ARM의 칩이 사용되는 영역도 기존 스마트폰을 넘어 ‘모든 사물’로 확대될 수 있다.

특히 가장 기술 진화의 속도가 빠른 자동차용 반도체 부문에서 ARM의 차량용 칩 설계 기술은 삼성전자가 자동차 전장 부품 사업에서 더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9조30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해 인수한 미국의 전장 전문기업인 하만그룹을 인수했다. 삼성전자가 ARM과 협력해 하만의 전장 부품에 들어가는 차량용 칩을 직접 생산해 사업 영역을 넓힐 수도 있다.

ARM 기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이미지.

ARM 입장에서는 최대의 고객사 중 하나인 삼성전자가 여러 종류의 많은 반도체를 시장에 내놓을 수록 돈이 된다. 반도체 설계 IP를 제공하고 라이선스 비용을 받는 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ARM에 삼성이 지불하는 특허사용료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 지난 2014년까지만 해도 1조원 수준에서 맴돌던 삼성의 특허사용료는 지난해 4분기 기준으로 5조원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치솟고 있다.

ARM 고위 관계자는 "ARM은 저전력 모바일 AP 설계에 특화한 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ARM의 반도체 설계 IP는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며 "특히 ARM은 차량용 반도체를 비롯해 IoT, 5G, 뉴메모리 등의 분야에서도 다수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와 다방면에서 협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