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화장품 시장이 연간 1조원 규모로 커졌다. 예전에는 스킨, 로션뿐이었지만 이제는 BB크림, 에센스, 아이크림, 색조 화장품 등 품목과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말 그대로 꾸밀 줄 아는 남자가 대세다.

화장품 업체들은 남성 화장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쏟고 있다. 에뛰드하우스가 남성에게 친근한 배우 마동석을 모델로 기용해 광고를 선보인 게 대표적이다. 지난 9월 30일 출시한 ‘애니 쿠션 크림 필터(쿠션 파운데이션)’는 마동석 쿠션으로 불리며 단숨에 에뛰드하우스 내 판매 순위 3위권에 올랐다.

화장하는 마동석.

외모에 민감한 10~20대뿐 아니라 대면 업무가 많은 30~40대, 노화 방지에 신경 쓰기 시작하는 50대 이상 남성들도 화장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지만, 실제로 도전하기는 쉽지 않다. 화장법을 배울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혼자서 해보겠다며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욕만 먹기 십상이다.

‘아재’들도 쉽게 화장하는 법은 없을까? ‘화알못(화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30대 중반 기자가 메이크업 전문가인 ‘홀리’, ‘레오제이’와 함께 남성 화장의 세계를 체험해봤다.

◆ 뷰티 크리에이터들과의 어색한 만남 '치킨도 아닌데 반반이라니'

“안녕하세요. 박 기자님 레페리 최인석 대표입니다. 추천드릴 크리에이터는 ‘홀리 & 레오제이’입니다. 메이크업 전문가라 남성 메이크업도 의미있게 해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촬영 장소는 저희 오피스의 스튜디오를 활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국 생방송도 동시에 진행 가능합니다.”

‘스튜디오? 중국 생방송?’

80여 명의 아시아 뷰티 크리에이터(1인 콘텐츠 제작자)를 보유한 MCN(다중 채널 네트워크) 업체 ‘레페리 뷰티 엔터테인먼트’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나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실감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고 해야 할까?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레페리 본사로 이동하고 있는 기자.

단순히 ‘남성 메이크업을 체험해 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취재 아이템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글로벌 떡밥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최소 10년간 술자리에서 매번 화장 이야기가 안주로 나올듯 싶었다. 머릿속에선 임창정의 노래가 들려왔다. “떠나거든, 내 소식이 들려오면 이제는 모른다고 해줘.”

18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전날 밤 두려운 마음에 잠을 설쳐 몸이 욱신거렸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오후 2시 30분에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레페리 본사를 찾았다.

사무실 입구에 진열된 다양한 화장품, 테이블 위에 수북이 놓인 화장 도구, 동영상 촬영용 DSLR 두 대와 스탠드 조명. 화알못에겐 모두 생소한 풍경이었다.

홀리와 레오제이를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진짜 재밌을 것 같아요”라며 해맑게 웃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했다. ‘뭔가 있구나.’

“저희 팬들이 반반 메이크업을 좋아할 것 같아서요(웃음). 반쪽은 레오제이님이 ‘훈남’ 메이크업을 하고 다른 반쪽은 제가 ‘훈녀’ 메이크업을 해볼게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반반 메이크업을 선보인 홀리. 이 영상의 조회수는 200만건을 넘었다.

‘치킨도 아닌데 반반이라니…. 이 시국에 기자가 이런 걸 하고 있어도 되나? 아니 그보다 앞으로 취재는 어떻게 하지? 이러려고 기자 됐나.’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큐 사인이 떨어졌다. “안녕하세요. 홀리 앤 레오제이입니다. 홀레~~~.” 밝은 오프닝 멘트와 함께 내 영혼 일부도 우주 어딘가로 날아갔다.

◆ 남자 화장의 핵심은 눈썹…“1초 승리” 칭찬에 모든 것 내려놔

레오제이가 선공(先攻)에 나섰다. 중학교 때부터 혼자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남성 화장의 고수답게 거침없이 베이스 메이크업에 들어갔다.

베이스 메이크업은 건설로 치면 ‘기초공사’다. 잡티를 가려주고, 피부톤을 잡아주는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지더라도 피부가 깨끗하지 않으면 화장이 죽는 법이다. 피부결을 정돈해주는 프라이머(이날 이런 화장품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를 먼저 바르더니 곧바로 파운데이션으로 왼쪽 얼굴을 덮었다.

화장 전문가 홀리(왼쪽), 레오제이(오른쪽)에게 화장을 받고 있는 모습.

이에 질세라 홀리도 내공을 실어 후공을 펼쳤다. 남성 메이크업보다 피부가 밝아야 한다며 두 세 톤 밝은 파운데이션을 오른쪽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얼굴 정중앙에 그려진 기준선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아수라 백작 탄생의 서막이었다.

“자 이제 눈썹을 좀 다듬을게요. 남성 메이크업의 핵심은 눈썹이에요. 눈썹만 잘 다듬어도 얼굴이 훨씬 살아나죠.”

말을 뱉기 무섭게 레오제이가 눈썹칼을 꺼내 들었다. “슥슥 삭삭” 눈썹 깎는 소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다. ‘이젠 되돌릴 수 없어 화장을 지우더라도 깎은 걸 다시 붙일 순 없지. 후후. 난 이제 틀렸어’라고 되뇌이고 있을 때쯤 “승리(그룹 빅뱅의 멤버) 닮으신 것 같아요. 1초 승리.”라는 칭찬이 들려왔다. 모든 근심을 내려놓게 만들어 준 마법 같은 한 마디였다.

남자 아이돌 메이크업을 선보이고 있는 레오제이.

◆ 자신감 UP! 남성들이여 두려워 말라

눈썹 손질 이후에도 화장은 계속됐다. 개인적으로 다크 서클을 감춰주는 화장이 특히 맘에 들었다. 평생 달고 살았던 눈 밑의 검은 그림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 이래서 화장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양한 화장용 브러시로 얼굴의 윤곽을 잡아주는 섀딩(음영) 작업, 혈색 좋아 보이는 입술 화장까지 끝내고 나니 훈남 메이크업(왼쪽)이 완성됐다. 모델이 ‘아재’라서 큰 효과를 내진 못했지만, 욕먹지 않을 수준은 됐다.

훈녀 메이크업으로 진행한 오른쪽에선 짙은 아이라이너와 속눈썹을 붙이는 대공사가 펼쳐졌다. 어느새 눈은 두 배가 됐고, 입술은 붉게 빛났다. 콧대에 하이라이트(윤곽선을 밝게 만드는 화장법)까지 넣고 나니 아수라 백작이 따로 없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반반 메이크업이 완성됐다.

재미를 위해 진행한 반반 메이크업을 모두 마치고, 얼굴 전체를 훈남 메이크업으로 완성했다. 동영상을 보고 따라 한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에 서툰 남성이라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화장법이다.

촬영을 하며 새롭게 배운 꿀팁도 적지 않다. 피부톤에 맞는 파운데이션을 고르려면 턱 선에 살짝 발라 목 색깔과 비교해 보면 된다. 눈썹 형태를 얼굴 비율에 맞게 그리려면 코끝에서 동공 끝을 연결한 선을 눈썹 산(눈썹에서 가장 높은 부분)으로, 코끝과 눈끝을 연결한 선을 눈썹 꼬리로 잡으면 된다.

◆ 인터넷 쇼핑몰서 남성 화장품 판매액 증가 추세

화장을 다 끝내고 거리를 걸어봤다. 사람들이 수군수군 댈 것 같았지만, 의외로 삐딱한 시선을 던지는 이는 없어 보였다.

평소 얼굴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도 화장으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을 느낀 하루였다. 남성 화장품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여성 메이크업을 지운 뒤 남성 메이크업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남성이 화장의 세계로 뛰어들고 있다. 11번가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9일까지 40~50대 남성의 마스크팩 구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103% 증가했고, 같은 기간 비비크림과 아이크림 구매액도 각각 72%, 55% 늘었다. 오프라인에서 화장품을 사기 부끄러운 아재들이 인터넷 쇼핑몰을 찾고 있다. 자신감을 되찾고 싶은 아재들이여, 지금 당장 본인에게 맞는 화장품을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