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엑소브레인’이 큰 점수 차로 경쟁자들을 이기고 있는 가운데, 자 이제 마지막 문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제해 주시죠.” 사회자인 김일중 아나운서가 말하자 이지애 아나운서가 차분히 문제를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30점 주관식 문제입니다. 1944년 네덜란드의 천체물리학자 헐스트의 예언 후 6년 만에 처음으로 검출된 전파입니다. 중성 수소에서 방출되는 이 파의 관측을 통해 우리 은하의 나선 구조가 밝혀졌는데요, 이 전파는 무엇일까요?”

EBS 장학퀴즈 ‘대결! 엑소브레인’ 본 녹화 장면. 가운데 모니터가 엑소브레인이다.

지난 18일 오후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7층 대강당. ETRI와 20여개 기관이 공동 개발중인 인공지능(AI) ‘엑소브레인(Exobrain)’과 인간과의 퀴즈 대결인 EBS 장학퀴즈 ‘대결! 엑소브레인’ 리허설이 진행됐다. 1시간을 넘게 진행된 리허설에서 엑소브레인은 인간 경쟁자를 여유있는 점수 차로 압도했다.

이 날 대결을 펼친 참가자는 엑소브레인과 4명의 인간을 포함한 5명이었다. ‘지니어스’, ‘브레인서바이벌’ 등 두뇌게임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 대표 오현민 씨(KAIST 수리과학과 13학번 휴학생)와 이정민 양(하반기 장학퀴즈 왕중왕전 우승자, 대원외고 2학년), 김현호 군(상반기 장학퀴즈 왕중왕전 우승자, 안산 동산고 3학년), 윤주일 씨(2016학년도 수능 만점자, 서울대 인문대 1학년)와 엑소브레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 예견된 엑소브레인의 ‘싱거운’ 승리…기계에 다소 유리한 진행 방식

리허설은 1라운드(객관식 5문제, 각 10점)와 2라운드(주관식 4문제, 각 20점), 3라운드(주관식 3문제, 각 30점)로 이어졌다. 리허설 마지막 문제가 나오자 현장은 술렁였다. 이정민 군과 김현호 군이 답을 내지 못한 가운데 오현민 씨는 ‘중수소파’, 윤주일 씨는 ‘마이크로파’를 답으로 적어냈다. 엑소브레인이 제시한 답은 ‘21cm’였다. 정답은 ‘21cm파’였다. 3라운드로 갈수록 문제의 난이도가 높아져 리허설 현장에 있었던 취재진과 관계자들도 답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엑소브레인만 정답을 맞힌 것이다.

리허설에서 엑소브레인이 답을 적지 못한 모습.

마지막 문제까지 마친 이정민 양은 “마지막 문제의 정답은 처음 들어본 것인데도 엑소브레인이 써낸 정답을 보니 저런 이름(21cm파)의 전파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난이도 있는 문제를 접한 참가자들은 엑소브레인에 압도당한 심경을 드러냈다.

실제로 ETRI와 9개 기업, 10개 대학이 연구에 참여한 엑소브레인은 9~10월 동안 장학퀴즈 우승자, 수능 만점자 등과 10차례 모의 대결을 치뤘다. 이 과정에서 엑소브레인은 8승 2패라는 성적을 거뒀으며 사람이 상식으로 추론할 수 있는 쉬운 문제를 틀리는 경우가 있어 부정형 문제, 연상추론형 문제 등의 경우 알고리즘 개선으로 성능을 더욱 끌어올렸다.

이번 대결의 방식은 2011년 IBM왓슨이 참가해 우승한 미국 퀴즈쇼 ‘제퍼디 쇼’와 다르다. 제퍼디 쇼는 먼저 정답을 알아낸 사람이 부저를 눌러 정답을 맞히는 방식이다. 제퍼디 쇼에서 출제됐던 문제의 문장수는 최대 2문장이었지만 ‘대결! 엑소브레인’에 출제된 문제의 문장수는 2문장 이상이었다. 장학 퀴즈 방식이 제퍼디 쇼보다는 기계한테 유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리허설이 진행되는 현장에서는 ‘고등학생이 풀 수 있는 난이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문과와 이과가 구분되는 교육을 받은 출연자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도다’ ‘본 녹화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출제된다면 엑소브레인이 이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제를 듣다가 정답을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부저를 눌러 정답을 맞히는 일반 퀴즈 대회와 달리 문제를 다 듣고 15초 제한시간 내에 답을 쓰는 방식은 엑소브레인에게 유리한 것 아니냐’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아무리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지닌 참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12만 권의 서적에 해당하는 분량의 지식을 축적한 엑소브레인을 이기기 힘든 것 아니냐는 것이다.

리허설이 끝나고 비공개로 진행된 장학퀴즈 본방송 녹화의 결과는 예상대로 엑소브레인이 2등에 160점 앞선 510점(600점 만점)으로 완승했다. 리허설 현장을 지켜본 이들은 본 퀴즈 대회에서 엑소브레인이 확실한 우위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 엑소브레인, 한국어 처리ㆍ지식 탐색 ㆍ추론 가능성 보여 줘

엑소브레인의 핵심 기술은 인간 수준으로 문장과 문법을 분석할 수 있는 ‘한국어 분석 기술’, 텍스트 빅데이터를 대상으로 언어지식과 단어지식을 학습하고 저장하는 ‘지식 축적 및 탐색 기술’, 여러 개 문장으로 구성된 질문을 이해하고 정답을 추론하는 ‘자연어 질의 응답 기술’ 등이다.

2013년부터 진행된 엑소브레인의 연구는 총 3단계로 10년 동안 진행된다. 이번 대결은 4년차인 1단계 개발 기술 수준을 검증하기 위해 이뤄졌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되는 1단계 연구는 일반지식 대상 분석형 엑소브레인 기반 기술 개발이 목표다. 한국어 처리, 지식 학습과 추출, 질문 분석을 통한 단답형 질의응답 기술이 포함된다.

내년부터 2019년까지 예정된 2단계에서는 법률, 금융, 특허 등 전문지식 대상 엑소브레인 SW 응용 기술이 개발된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단계에서는 글로벌 전문지식 대상 엑소브레인 SW 상용 기술 개발이 목표다.

장학퀴즈에 참가한 엑소브레인 모니터.

이번 ‘대결! 엑소브레인’에서 대결을 펼친 엑소브레인은 인터넷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 41대와 376개의 CPU코어, 3테라바이트의 메모리로 구성됐다. 12만 권의 서적에 해당하는 분량의 지식을 저장해 문제를 이해하고 축적한 지식 중 정답이 될 만한 후보를 수백 개 뽑은 뒤 가장 정답에 가까운 답을 추론하는 게 핵심이다.

2011년 제퍼디 쇼에 출전한 왓슨은 ‘IBM 파워 750 서버’ 90대와 CPU 코어 수는 2880개였다. 주 메모리 용량의 경우 엑소브레인은 3테라바이트, 왓슨은 15테라바이트다. 엑소브레인은 이번에 서적 12만 권(48기가바이트)의 지식을 습득하고 출전했지만, 왓슨은 약 100만 권의 서적(4테라바이트)에 달하는 지식을 습득하고 퀴즈쇼에 나갔다.

엑소브레인 개발 총책임자인 박상규 ETRI 책임연구원은 “통상 장학퀴즈 질문에 대한 엑소브레인의 정답률은 약 85%에 달한다”며 “질문의 난이도에 따라 얼토당토 않은 답을 내거나 답을 아예 못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습득한 지식 내에 없거나 추론 능력이 부족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리허설에 출제된 12문제 중 엑소브레인이 맞히지 못한 문제도 있다. 3라운드 문제 중 ‘팔의 동맥혈관을 외부에서 눌러 막은 후 서서히 열면 피가 다시 흐르게 되는 순간부터 소리가 나는데요, 소리가 발생할 때 관찰되는 압력의 값은 수축기 혈압, 소리가 없어질 때는 이완기 혈압으로 정의합니다. 혈압을 잴 때 청진기를 압박대 속에 넣는 이유가 바로 이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인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라는 문제에 엑소브레인은 답을 적어내지 못했다. 이 문제의 답은 ‘코로트코프음’으로 다른 출연자들은 ‘판막’, ‘맥박’이라는 오답을 내놨다.

◆ 구글 알파고와의 차이점은? ‘딥 러닝' 적용 여부

이번 대결에 참가한 엑소브레인과 제퍼디 쇼에서 이긴 왓슨은 이세돌 9단을 제압한 구글 ‘알파고’와도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딥러닝(심층 인공신경망을 이용한 기계학습)’ 적용 여부다. 엑소브레인과 IBM 왓슨은 자연어 처리 중심의 규칙 기반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쓴다. IBM이 왓슨에 딥러닝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제퍼디 쇼에 나가고 4년이 지난 지난해부터였다.

박 연구원은 “엑소브레인은 자연어 처리 중심의 기술로 언어의 불확실한 의미를 컴퓨터가 이해하도록 만드는 연구인데 반해 알파고의 경우 심층 인공신경망을 통한 강화학습과 딥러닝으로 바둑 등 게임에 특화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딥러닝의 경우 인공지능이 어떤 결정을 해도 어떤 과정과 근거로 결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엑소브레인은 왜 답을 못 냈는지, 또는 왜 틀린 답을 냈는지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며 “엑소브레인은 딥러닝처럼 아주 쉽게 자동으로 많은 지식을 학습시키는 것에는 약하지만 법률, 특허, 금융, 상담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하는 데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TRI는 엑소브레인의 우승 상금으로 받은 2000만원을 울산시 수해 지역 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할 예정이다. 18일 진행된 장학퀴즈 ‘대결! 엑소브레인’은 오는 12월 31일 EBS를 통해 오후 5시 45분에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