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일 케이블TV 업체 CMB의 대전 지역 가입자들은 MBC의 최신 주문형비디오(VOD)를 볼 수 없었다. MBC가 이날 일방적으로 VOD 제공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른채 VOD를 볼 수 없게 된 시청자들은 하루 종일 CMB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지상파 방송사는 이 건을 포함해 케이블TV 업체로의 VOD 제공을 올해에만 네 차례 중단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돌아갔다.
MBC의 VOD 제공 중단 배경에는 가입자당 재송신료(CPS) 분쟁이 숨어있다. 그간 지상파와 케이블TV 업계는 일종의 저작권료인 CPS 인상안을 두고 갈등을 빚어왔다. 지상파 측에서는 현재 280원인 CPS를 400원으로 올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고, 케이블TV 업계는 너무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료방송 업계가 제대로 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지상파에 수시로 휘둘리는 현 상황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상파 방송을 별도 상품으로 구성해 원하는 시청자만 선택해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지상파 CPS 인상분을 유료방송 고지서에 표시해 지상파 방송사들이 가격을 함부로 올릴 수 없도록 하자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 "지상파에 주는 재송신료 부담 너무 커"
CPS를 둘러싼 지상파와 유료방송 업계의 분쟁은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일례로 MBC는 2011년 4월 수도권 위성방송(KT스카이라이프) 공급을 6일간 중단했다. 같은달 SBS 역시 수도권 위성방송 공급을 끊었다. SBS의 방송 공급 중단은 48일간 이어졌다. 모두 CPS 인상 여부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브라질 월드컵이 열린 2014년 6월에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월드컵 콘텐츠에 대한 별도 대가를 요구했다. 이 협상은 끝내 결렬됐고, 모바일 IPTV(인터넷TV) 가입자들은 월드컵 기간 내내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축구 경기를 시청할 수 없었다.
물론 반대로 유료방송 사업자가 지상파 방송 송출을 중단한 적도 있다. 케이블TV 업체들은 2011년 11월 지상파 3사의 HD(고화질) 방송 송출을 8일 동안 끊었고, 2012년 1월에는 KBS2 방송 송출을 이틀간 중단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분쟁 원인은 지상파의 무리한 CPS 인상 요구였다.
지상파의 CPS 인상 요구는 최근 들어 더 심해졌다. 경영 상황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방송 업계는 2012년 이후 광고매출 1위 자리를 온라인에 빼앗겼다. 지상파 방송 사업자들의 방송광고 시장 점유율 역시 2006년 75.8%에서 2015년 55.0%까지 낮아졌다.
유료방송 업계는 "지상파가 과도한 CPS 인상을 통해 실적 악화를 만회하려는 건 비겁한 행동"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미 IPTV 3사와 CJ헬로비전, 딜라이브, 티브로드 등 대형 케이블TV 업체 대부분이 지상파 요구를 수용해 CPS 400원을 주고 있지만, 이들 기업도 가입자 이탈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합의했을 뿐 불만이 가득한 상태다.
CPS 인상을 수용한 한 대형 케이블TV 업체 임원은 "케이블TV 업계의 가입자 1인당 평균 매출액(ARPU)이 8000원 정도인데, 여기서 지상파 3사에 주는 CPS만 해도 15%에 해당하는 1200원"이라며 "지상파를 제외한 나머지 프로그램 공급사(Program Provider·PP)들에 줄 수 있는 돈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 "재송신료 산정 근거 없어"…시청자 선택권 도입 추진
전문가들은 CMB 등 여전히 지상파와 대립 중인 케이블TV 업체 10여곳이 CPS 400원 요구를 수용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지상파가 애초에 CPS를 400원으로 산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자간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인상·인하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추가 인상 요구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성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이달 9일 서울 양천구 목동 한국방송회관에서 열린 '유료방송 발전방안 제2차 공개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해 지상파의 CPS 산정 근거 부재를 지적했다. 김 교수는 "불확실성이 높다보니 사업자 입장에서는 '올해 400원 주면 내년엔 진짜 안오를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상파 3사가 각기 다른 회사인데 CPS는 280원으로 똑같은 것부터 이상하다"며 "원가 산정 기준이 없으니 돈을 줘야 하는 사업자는 납득을 못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유지상 광운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직접 수신율이 5~6%에 불과한 지상파는 점점 유료방송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PP 중 하나의 개념으로 변해가고 있다"며 "(그런 지상파가) 공적 주파수도 무료로 사용하면서 CPS 인상까지 계속 요구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지상파의 CPS 점유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중소 PP들이 성장할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PP들이 콘텐츠 제공 대가를 넉넉하게 받지 못할 경우 전체 유료방송의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성철 교수는 "콘텐츠에 기여하는 일반 PP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줄어드는 데 CPS를 무작정 올리라고 하는 건 지상파 혼자만 살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정부는 연내 확정할 계획인 '유료방송 발전방안'에 케이블TV 업계가 제안한 '지상파 별도상품'과 '요금 표시제'를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지상파 별도상품은 지상파 방송을 하나의 별도 상품으로 구성해 시청자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자는 것이다. 요금 표시제는 요금 고지서에 지상파 요금을 별도로 표시하는 것이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시청자 선택권'에 있다. 지상파 별도상품은 시청자가 지상파를 선택하면 그만큼 요금을 더 내고, 시청하지 않겠다고 하면 덜 내는 구조다. 요금 표시제는 지상파가 무조건 포함돼 있으면서 요금만 유료방송과 별도로 표시하는 것이다.
김정수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사무총장은 "유료방송 요금이 선진국 대비 저가로 고착화된 국내 시장 환경에서 CPS 인상분을 유료방송 업체들이 계속 끌어안고 갈 순 없다"며 CPS가 인상된 만큼 시청자가 내야 하는 비용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이어 김 사무총장은 "지상파 별도상품과 요금 표시제는 지상파 가격을 시청자에게 공개해 견제하려는 고육책(苦肉策)"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