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틸(Peter Thiel) 페이팔 공동창업자 겸 페이스북 이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인수위원회에 합류했다. 틸은 대선 기간 ‘반(反) 트럼프’ 성향이 강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거의 유일하게 트럼프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인물이다. 트럼프에게 125만달러(약 14억1300만원)를 선거 자금을 지원해 실리콘밸리에서 ‘왕따’에 내몰렸던 그가 트럼프 당선을 등에 업고 화려한 행보를 예고하고 있다.

1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주요 외신은 트럼프 당선인이 인수위원회 집행위원 명단을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틸은 이날 마이크 펜스(Mike Pence) 부통령 당선인이 이끄는 집행위원 16인 명단에 트럼프 당선인의 세 자녀와 사위 등과 같이 이름을 올렸다.

틸이 인수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틸은 그동안 자신이 정계에 진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할 수 있는 한 트럼프를 도울 것”이라고 말해 왔다.

10월 30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 열고 피터 틸 페이팔 공동창업자가 트럼프 지지 발언을 하고 있다.

◆ 페이팔 마피아의 거두, 틸이 트럼프 경제 정책 지지하는 이유는?

틸은 1998년 인터넷 결제 서비스 업체 페이팔을 공동창업하고 2002년에 회사를 이베이에 매각했다. 이후 틸은 벤처투자자로서 페이스북, 링크드인, 에어비앤비, 스페이스X 등에 초기 투자해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실리콘밸리 실력자들)의 거두로 떠올랐다.

실리콘밸리에서 거부가 된 그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그는 트럼프 지지 기자회견 등에서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미국 국민의 도움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그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를 미국 사회와 나누지 않으며 주식에도 거품이 끼어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경제 정책이 실리콘밸리에 자본이 집중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공개 지지한 것이다.
그는 "부유한 실리콘밸리의 대기업들이 대다수 미국인이 마주한 어려운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저조한 저축률, 청년들의 빚, 과도한 국방비 지출 등을 언급하며 "트럼프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는 내국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해외 노동자들에 대한 비자 규제를 강화하고, 외국에 있는 기업의 제조 공장을 미국 본토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이같은 공약에 대해 대다수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크게 반발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미국에 이민 온 기술자를 채용하고 제조 공장도 주 판매처인 중국 등 아시아에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틸이 자신의 저서 ‘제로 투 원(Zero to One)’에서 밝힌 경제관도 트럼프의 경제 정책과 맥이 통하는 점이 있다. 그는 기업이 독보적인 아이디어와 기술 개발을 통해 사회에 혜택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에 돌아가야 하는 혜택을 제한하고 기업들이 사회의 희생을 대가로 너무 큰 이윤을 차지하면 안 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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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피터 틸은 공화당 전당대회 트럼프 지지 연설에 참여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에도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발언해 이목을 끌었다.

틸이 트럼프 당선인의 경제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트럼프 당선인이 내놓은 모든 공약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올 7월에 열렸던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며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공화당의 공약에 지지하는 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미국에서 성적소수자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인 만큼 공화당을 지지하는 틸의 이같은 발언은 화제가 됐다.

트럼프 당선인은 결혼을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동성애자 결혼 반대법 등을 언급하며 역사상 가장 ‘반(反) 성적 소수자’적인 대선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틸은 공화당이 내놓은 성적소수자 권리 제한과 같은 정책들이 정작 중요한 경제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분산시킨다며 비판했다.

◆ 피터 틸, 트럼프와 실리콘밸리 잇는 다리역할 할까

틸은 그동안 정계에 진출할 생각은 없다는 점은 고수해왔기에 그의 트럼프 인수위원회 합류는 의외라는 반응이다. 틸은 선거 직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벤처투자자로서 트럼프가 당선됐다는 게 기쁠 뿐이다”며 “워싱턴에서 자리를 차지할 생각은 없다”고 정계 진출을 일축했다.

지난 9일 트럼프 당선인이 차기 대법관 후보 20명에 틸을 포함하자, 틸은 “나는 법조계에서 20년 동안 일한 적이 없다”며 이를 부인하기도 했다. 틸은 스탠퍼드대 로스쿨을 졸업해 뉴욕 유명 법률 사무소에서 7개월 동안 일한 적이 있다.

10일 미국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는 틸이 트럼프의 인수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될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틸이 지난 두 번의 대선동안 꾸준히 공화당을 지지한 ‘골수팬’이었고,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를 축하하며 “능력이 되는 한 트럼프를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외신 보도에 틸과 트럼프 양측 대변인 모두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지만, 결국 틸은 제45대 미국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 집행 위원에 11일 이름을 올렸다. 틸이 위원회의 유일한 IT 인사다. 아직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맡게 될지 알려진 바는 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은 “틸이 실리콘밸리 출신인 만큼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심한 실리콘밸리와 트럼프 당선인을 이어줄 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 분석했다. 피터 틸은 지난달 30일 트럼프 지지 기자회견에서 "내 미래는 IT 산업에서 계속될 것"이라며 "내가 잘하고 즐기는 분야"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실리콘밸리 사람들은 이제 피터 틸이 새 행정부의 각종 규제와 정책적 문제 등에 있어서 실리콘밸리를 대변해줄 유일한 후견인이자 지지자가 돼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