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램과 낸드플래시로 양분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변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신(新)메모리 시대의 포문을 연 건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이다. 중앙처리장치(CPU)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해온 인텔은 지난해 D램, 낸드와 전혀 다른 구조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인 '3D 크로스포인트'를 공개하며 30년 만에 메모리 시장에 다시 진출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급증하는 메모리 수요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눠 먹는 걸 그냥 두고만 보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였다.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 기술은 속도는 빠르지만 가격이 비싸고 전원이 끊기면 정보가 날아가는 D램과 비휘발성이고 싸지만 속도가 느린 낸드의 장점만을 골라 만든 기술로 알려져 있다. 인텔의 주장대로 3D 크로스포인트 기술이 위력적이라면, 삼성전자가 차지한 D램, 낸드 시장이 급격하게 줄어들 수 있다.
넷리스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공룡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 기술에 대항할 신기술이 필요했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넷리스트에 약 270억원의 투자와 함께 상호특허협력(크로스라이선스)을 체결했다. 당시 만난 삼성전자의 고위 임원은 "생명보험을 든 셈"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경영진들이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 기술을 견제할 한 수로 넷리스트를 골랐다는 뜻이다.
넷리스트는 LG전자 반도체 출신의 홍춘기 대표(사진)가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얼바인에서 창업한 서버용 메모리 모듈 전문 기업이다. 창업 초기 HP, IBM, 델, 애플 등 글로벌 기업에 메모리 모듈을 공급하기 시작하며 성장 기반을 마련했고 서버용 메모리 모듈 기술 특허를 무기로 관련 시장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 왔다.
직원수가 200여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는 중소기업도 아닌 '영세기업'에 속하지만 샌디스크, IDT, SK하이닉스 등 거대 기업들과 '특허전쟁'을 벌일 만큼 탄탄한 특허 기반을 갖고 있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차세대 기술인 비휘발성메모리모듈(NVDIMM)도 생산 과정에서 넷리스트의 기술특허를 우회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특히 삼성전자 입장에서 넷리스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이 회사가 보유한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 기술 때문이다. 넷리스트는 내년부터 SCM 제품인 하이브리드 DIMM(Dual In-line Memory Module)을 양산하며 본격적으로 차세대 메모리 시장 개척에 나설 예정이다. SCM이란 D램의 고속 처리 기술과 플래시 메모리의 비휘발성을 동시에 갖춘 제품으로,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도 넓은 개념으로 보면 SCM에 해당된다.
2일 조선비즈는 홍춘기 넷리스트 대표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넷리스트의 성장 과정과 격동의 시기에 접어든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대한 전망을 들어봤다. 홍 대표는 "지난 30년 동안 반도체 산업에 종사해왔는데 이제 반도체 산업의 초점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며 "특히 빅데이터, 클라우드, 인공지능(AI) 등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차세대 반도체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음은 홍춘기 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
― 넷리스트를 창업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8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 말까지 LG전자 반도체 부문에서 15년간 근무했습니다. 10년은 본사에서 근무를 했고, 5-6년 동안 실리콘밸리 반도체 주재원으로 있었습니다. 이때 경험이 창업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당시 IBM, 델,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의 비즈니스를 담당하면서 반도체 업계의 핵심 인물들과 직접 만나며 컴퓨터 분야의 속성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세계 무대 경험도 쌓을 수 있었습니다.
― 한국이 아닌 얼바인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뭔가요.
"한국은 반도체 원재료, D램, 낸드 등 칩 단계 산업 위주였고 이 단품 칩을 모듈로 만들어 컴퓨터에 적용하는 인프라는 2000년 창업 당시 얼바인 주변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창업이라는 건 사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자금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연구개발(R&D)에 투자를 많이 하다보니 비용부담이 커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닷컴버블 붕괴로 반도체, 인터넷 등 첨단 분야 시장이 전체적으로 크게 냉각돼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도 끝까지 해내겠다는 뚝심과 끈기,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습니다. 꾸준히 고객사를 유치하고, 고객사가 요구하는 제품을 제공하면서 신뢰를 쌓았고, 기술력도 인정받아 2006년에는 나스닥에 상장했습니다. 최근에는 그동안 집중해온 하이브리드 반도체, SCM 시장이 커지고 있어 앞으로 성장을 더욱 기대하고 있습니다."
― 샌디스크, IDT 등 대형 반도체 기업들과 수년간 특허 소송 끝에 승리했습니다. 회사가 보유한 기술 특허가 서버용 메모리 모듈 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나요.
"넷리스트의 핵심 기술은 메모리 반도체와 서버 스토리지 장비를 연결하는 것으로, 메모리 반도체 칩과 서버 스토리지의 중계 역할을 하는 시스템의 두뇌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리스트가 보유한 코어 아키텍처 특허는 하이브리드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기술로 회피가 불가능합니다. 만드는 것 자체가 특허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넷리스트의 특허는 대부분 서버용 메모리인 RDIMM, LRDIMM, NVDIMM 관련 원천 기술입니다.
최근의 사례를 말씀드리면, 2015년 11월 미국 D램 모듈 컨트롤러 업체 인파이가 제기한 LRDIMM 관련 특허 무효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것이 있습니다. 2010년 인파이는 넷리스트의 LRDIMM 핵심 특허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미국 특허청에 특허의 유효성에 대한 재심사를 요청했으나 2012년 특허청은 넷리스트가 출원한 특허 항목 모두 유효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NVDIMM(비휘발성 메모리 모듈) 분야에서도 넷리스트는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초 샌디스크가 자회사와 함께 넷리스트의 NVDIMM 관련 특허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특허청은 재심사를 거절한 바 있습니다. 재심사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특허의 유효성이 강력하다는 의미입니다.
반도체 모듈 제품을 만들면서 노하우를 축적해 지적 재산권 확보를 위해 특허도 출원해 온 덕분입니다. 하이브리드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는 경쟁업체들보다 기술적으로 5~6년을 앞서 있다고 자신합니다."
― 지난해 맺은 삼성전자와의 크로스라이선스와 투자 유치가 구체적으로 회사의 성장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크로스라이선스가 맺어진 상태에서) 공동 개발을 하게 되면 좀 더 효율적으로 차세대 메모리를 개발할 수 있고, 법적 문제 없이 각사의 특허를 교류할 수 있습니다. 넷리스트 입장에서는 투자와 함께 삼성처럼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앞서있는 기업과의 공동 개발은 기술력 성장을 가속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삼성이라는 훌륭한 기업과 협력을 통해 차세대 메모리 시장에서 앞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직원 구성을 보면 LG 반도체, 브로드컴, AT&T 벨연구소, 도시바 등 다채로운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회사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넷리스트의 사업은 기본적으로 기술집약적인 지식재산 사업이기 때문에 구성원 대부분이 엔지니어입니다. R&D는 물론 영업, 제조까지 전직원의 70-80% 정도가 엔지니어출신입니다. (엔지니어가 많기 때문에) 최근 반도체 업계 트렌드인 기술 영업이 가능하고, 고객이 필요로 하는 가치를 현장에서 바로 제공할 수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 시대는 언제쯤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넷리스트는 내년부터 SCM 양산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업계 전반으로는 내후년부터 본격 양산 체제에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SCM 시장이 연간 수십억불 규모로 본격화되는 것은 2019년 이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빅데이터, 클라우드, AI, 고속 네트워크 서비스 등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서버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고 차세대 반도체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양산 이후 점차 기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대체해 나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공급 측면에서의 SCM 시장도 중요한데, D램이 이전만큼 큰 기술적 향상, 성장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을 열 신기술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SCM이 주목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세계 반도체 시장이 큰 변혁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반도체 산업 분야에서 활동해왔는데, 반도체 산업의 초점이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반도체가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기술집약적, 소위 반도체 프로세스와 더불어 응용과 디자인이 융합이 돼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 고객, 즉 사용자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반도체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가 정말 중요해질 것입니다.
컴퓨터의 부품이라고 인식되었던 반도체도 이제는 사용자의 혜택에 초점을 맞추어 최종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품 기획과 개발에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할 것입니다."
- 1958년 출생
- 1983년 LG전자·LG반도체 임원
- 1998년 바이킹 컴포넌츠 부사장
- 2001년 넷리스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