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기본소득 도입할 단계 아냐…한국경제, 일자리 창출할 여지 있어"
"공동체가 의료·주거·교육비 책임져 가처분소득 늘려주는 게 더 효율적"

"사회 보장의 핵심은 필요성의 원칙이다. 즉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 없는 사람에게까지 주는 건 과잉 복지다. 이렇게 되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래서 사회 보장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定義)가 중요하다. 적정 수준의 보장이 어느 수준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기본소득을 논의하기 전에 이 모든 사안에 대한 사회적 컨센서스(합의)가 있어야만 한다."

주류인 듯 주류가 아닌 경제학자. 직장은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다. 독일의 킬(Kiel)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마쳤다. 연구원 150여명의 연구원 중 독일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은 3명에 불과하다. 이런 독특한 이력 때문일까. 윤덕룡 선임연구위원은 달랐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도 그는 '효율성'과 '공동체'를 동시에 말했다. '기본소득이 현재 최선의 대안인가'라고 묻고 또 물었다.

화법(話法)도 독특했다. 4초, 5초, 6초가 지나도 대답을 하는 않는 그를 쳐다보면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러고선 '첫째, 둘째, 셋째' 두괄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맨 앞에 내세우며 한참을 답변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 진중한 성격이었다. 반대로 생각이 서면 청산유수였다. 질문의 뿌리를 찾아 돌진하는 그의 화법에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겉옷을 벗어던지고 소매를 걷어부쳐야 했다.

기본소득은 실험적 담론이다. 현실의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할 정책 수단이라는 평가와 함께 노동과 취업 의지를 가로막는 비이성적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뜨거운 감자'다. 자본이 노동력을 급속히 대체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자동화 시대의 도래는 이 논의를 더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지난달 19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달 19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그는 계절성 알레르기로 평소보다 잠긴 목소리였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기본소득에 대해 거침없이,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 "일자리 창출할 여지 있어…아직 기본소득 도입할 단계 아냐"

- 기본소득 논쟁이 한창이다.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신가.

"지향점에 대해서는 찬성이다. 지향점은 공동체 내의 모든 구성원의 생존과 생계가 보장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꼭 기본소득이어야 하는지, 지금 우리나라에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게 가장 좋은 대안인지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장기적으로 도입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다른 대안이 먼저 검토돼야 하지 않나 싶다."

- 기본소득의 지향점에는 동의하지만, 전면 도입에 대해서는 아직 물음표라는 건가.

"그렇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기술이 노동을, 자본이 노동을 대체하고 있다. 아디다스 공장이 독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몇 명의 노동자만 있으면 이제 공장을 돌릴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한 거다. 이런 식으로 자본이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면 일자리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지고, 노동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질 거다. 부(富)의 분배가 한쪽으로 쏠릴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이 단계까지 오지는 않았다는 판단이다. 이게 기본소득의 전면적 도입을 우려하는 첫 번째 원인이다. 아직 한국 경제는 일자리를 창출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 기본소득 논의가 성급하다고 보는 두 번째 이유는 뭔가.

"우리 공동체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지에 대한 컨센서스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 도입을 말하려면,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한다는 데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 사전 작업 없이 진행하면 극심한 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많다.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은 찬성, 고소득층은 반대할 텐데 강제로 돈을 내게 할 수는 없다. 사회적 합의 없이 진행하면 포퓰리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 다른 이유가 더 있나.

"기본소득이 과연 지금 실현가능한(feasible) 대안인가, 가장 합리적 대안인가의 문제다. 현재 누구나 공감하는 몇 가지 사회적 합의가 있다. 초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지만 노년층에 대한 사회적 보장이 빈약하다는 인식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떤 정책이 가장 필요한가. 기본소득인가? 개인적으로는 연금 정책을 손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행 30%인 퇴직연금 적립금의 소득세 감면 폭을 확 늘려야 한다. 왜 여기에 세금을 부과하나. 이게 오히려 더 실질적인 대안 아닌가. 합리적이고 현실가능한 대안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 또 다른 이유는 뭔가.

"사회 보장의 핵심은 필요성의 원칙이다. 즉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 없는 사람에게까지 주는 건 과잉 복지다. 이렇게 되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래서 사회 보장이 필요한 사람이 누군인지에 대한 정의(定義)가 중요하다. 적정 수준의 보장이 어느 수준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기본소득을 논의하기 전에 이 모든 사안에 대한 사회적 컨센서스(합의)가 있어야만 한다."

-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공동체를 단순히 줄여 말하면 하나의 가정이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일을 해 가정에 기여해야 가정이 부유해진다. 우리 사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반대로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를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은 공동체가 같이 보장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렇게 가는 게 맞다고 본다."

-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기본소득과 맥이 닿아 있는 실험을 하면서 내년 대선에서 화두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우리 사회에 공동체의 공동 책임 의식을 깨운 사건 아닐까 싶다.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시도가 없으면 아무도 공동체를 이야기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좀 더 합리적이고 정교해 질 필요는 있다."

이윤정 기자

◆ "흥청망청 쓰게 하기 보다 꼭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게 제도설계해야"

- 기본소득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도입한 기초연금이 기본소득의 단계적 도입의 한 사례라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단계적 접근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역시 이 논쟁에서도 '필요성의 원칙'의 적용이 필요하다. 기초노령연금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줘야 한다. 부자들에게 20만원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필요한 곳에 더 주는 게 맞지 않는가.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라고 본다."

- 기본소득의 장점으로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가족이 동반자살한 2014년 '송파 세모녀'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맞다. 기본소득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 분들도 이용할 수 있는 복지 제도를 충분히 다 모르셔서 그랬던 것 아닐까. 물론 제도를 충분히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는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도 어떤 복지 지원을 받으려면 자기가 움직여야 한다. 근거에 맞게 지원한다. 거동이 어렵거나 다른 제약이 있는 부분은 정부가 더 움직이고 자원봉사 단체 등 시민사회가 좀 더 활발히 움직여 보완해야 한다고 본다."

- 저소득층, 저학력층 등 사회적 약자들의 복지 접근권이 너무 약한 게 현실이다. 공동체가 구성원을 책임진다는 차원에서 보면 이제 기본소득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기본소득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솔루션(해결책)이 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연구는 필요하다고 본다."

-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택적 복지'가 좋다는 것인가.

"기본소득이 복지의 접근성 차원에서 가장 나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자. 비합리적인 소비 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 독일에도 사회 보조금이 풀리는 날 흥청망청하는 길거리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에게 소비 결정권까지 주는 것이 지금 옳은 결정이라고 할 수 있나."

- 기초연금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소비 결정권마저 국가가 간섭해야 하는가.

"공동체가 보조하는 자금 아닌가. 합목적적으로 지불될 수 있도록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우리의 공공 임대주택 같은 주거비를 개인에게 주지 않고 사회 보조금에서 바로 지불해 버린다. 오히려 이런 게 더 정의(正義)에 부합하지 않나."

이윤정 기자

◆ "공동체가 의료·주거·교육비 책임져 가처분소득 늘려주는 게 더 효율적"

- 기본소득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재원 문제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복지 수요는 계속 늘 수밖에 없으니 이제라도 증세를 논의하자는 의견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논의는 필요하다. 이런 흐름을 타고 내년 대선에서 기본소득 논의는 주요 이슈로 등장할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복지 지출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개개인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로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의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학계와 언론 등에서는 그 세부적인 디테일에 대해 연구하고 국민들에게 계속 전달해줘야 한다."

-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회 보장 시스템의 구축과 진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인가.

"그렇다. 재차 강조하고 싶은 건 사회 보장이라는 제도를 설계하고 추진해 나가는 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내년 대선에서 정치인들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만드려고 하는 지 등을 명확히 밝히고 이에 대한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5년 단임제든, 4년 중임제든 관계없이 흔들리지 않고 추진될 수 있다. 갈지(之)자처럼 왔다갔다 하면 사회적 효율성을 낭비하게 된다. 헌법에 사회보장의 의무와 그 범위와 규모를 박아두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 기본소득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내수 증진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의견도 피력한다.

"그럴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한계소비성향(증가한 소득 중에서 소비에 투입된 비율)은 고소득층은 굉장히 적지만, 저소득층은 높다. 소득이 생기면 바로바로 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면이 있다. 사회보장이 원래 이 역할을 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급전이 가장 필요할 때가 언제인가. 의료비, 주거비, 교육비 등이다. 사회보장이 이 부분을 커버해주면 국민들은 사실상 가처분 소득이 늘어난 효과로 소비를 더 하게 된다. 어느 게 더 효율적인가. 필수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부분을 공동체가 책임져줘야 한다. 이 방법이 더 정의롭고 공정하지 않나."

- 해외 사례는 어떻게 보고 계신지 궁금하다. 인도와 나미비아, 핀란드 등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가져가고 있다.

"워낙 나라별로 처한 조건과 상황이 달라 해외 사례를 기반으로 해서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건 어렵다. 위험한 질문이다(웃음). 아직 데이터가 부족해 기본소득 실험을 가져가고 있는 어떤 나라는 성공했고, 실패했다고 얘기하는 건 위험하다고 본다."

- 통일 전문가이시도 하다. 기본소득이 만약 도입된다면 향후 통일 과정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까.

"사회보장제도를 많이 늘려놓으면 통일 비용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독일 통일 당시를 되돌아보면, 통일 비용이 높아져 부담은 됐지만 사회보장제도가 통일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통일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 등의 문제를 사회보장제도가 희석시킨 면이 컸다. 일종의 통일 유지비용으로 사회보장제도가 역할한 셈이다.

반대로 예멘의 경우 통일 이후 '예전보다 살기 더 나빠졌다'는 인식이 커졌다. 사회보장제도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갈라서자고 내전을 하는 이유도 일정 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이처럼 사회보장제도는 통일을 이끌어 가는 하나의 버팀목이 된다."

◆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1959년생 ▲독일 킬(Kiel)대학 경제학 학사, 석사, 박사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교육재단 사무총장 ▲한국태평양경제위원회(KOPECC) 사무국장 ▲기획재정부 기금평가팀장, 공기업-준정부기관 경영평가팀장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자문위원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기획재정부 장관 대외경제자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