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칭다오의 작은 냉장고 공장에서 출발한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海尔)이 세계 가전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GE(제너럴일렉트릭)·산요 등 해외 기업들과의 대형 인수·합병(M&A) '빅딜'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중국 내수 시장을 벗어나 다국적 기업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자본을 동원한 M&A 위주의 성장 전략은 이미 IT, 제약, 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일반화된 방식이다. 피인수 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생산라인, 사업구조 등을 온전히 확보해 시장 진입장벽을 단숨에 넘을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이얼의 M&A 전략 역시 1차적으로는 미국(GE 인수), 일본(산요 인수) 등 핵심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이얼 로고.

하이얼이 미국, 일본 시장을 선택한 이유는 '선난후이(先難後易)'로 불리는 기업 철학과도 관련이 깊다. 선난후이는 어려운 시장을 먼저 공략하고 쉬운 시장을 나중에 공략한다는 의미다. 산요, GE 인수를 통해 두 기업이 수십년간 쌓아온 기술력과 사업 전략, 고객 기반을 흡수,진입장벽이 높은 일본과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는 한편 다른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 가전 명가 일본의 '기술력'과 하이얼의 '스피드'가 만났다

하이얼이 피인수 기업의 사업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점이다. 일본 산요를 인수한 후에도 하이얼은 산요의 브랜드 이름과 제품군, 고객 서비스 등의 사업 방식을 그대로 이어갔다. 대신 일본 전자 기업의 단점 중 하나로 꼽혀온 느린 제품 출시 주기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하이얼의 일본 법인인 하이얼아시아는 출범 이후 줄곧 적자를 기록했었고, 산요를 인수한 후에도 예상치 못한 엔화 약세로 한동안 적자를 지속했다. 부품의 90%를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조달하던 하이얼의 제품 생산 구조가 '엔저' 상황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2014년 이후 환율 안정화와 함께 생산 구도가 안착하면서 시너지 효과가 본격화 됐다.

장 루이민 하이얼 회장이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하이얼은 산요를 인수한 2012년을 기점으로 2012년 매년 8%대의 매출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 가전제품 시장이 연간 3~5% 성장한 것과 비교하면 높은 증가세다. 가전제품 가격 하락으로 인해 대부분의 글로벌 가전 제품 회사들이 10% 미만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반면 하이얼은 매년 14~1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매출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 진보 측면에서도 하이얼의 성과는 도드라진다. 올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전자박람회 'CES 2016'에서 하이얼은 삼성전자(005930)와 같은 날 사물인터넷(IoT) 기능을 담은 첨단 냉장고를 선보여 업계 관계자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하이얼은 삼성전자가 내놓은 제품을 다음 해에 그대로 모방하는 식으로 제품을 발표했었다.

당시 현장의 하이얼 아시아 관계자는 "하이얼이 올해 CES에서 선보인 스마트 가전이 사실상 삼성전자, LG전자, 파나소닉 등과 거의 같은 기술적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며 "산요의 핵심 엔지니어들이 제품 기획, 디자인을 맡고 기존 하이얼의 생산라인이 가장 효율화된 방식으로 제품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제품 개발 및 출시를 가속화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승찬 중국경영연구소장은 "일본 산요와 하이얼의 합병은 일본의 기술력과 홍색공급망(중국 내에서 부품을 스스로 조달하고 완제품 생산까지 마치는 자급자족식 공급망)으로 알려진 중국 기업의 빠른 부품 수급 및 생산라인이 본격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며 "일본식 제품 포트폴리오와 연구개발 역량, 노하우 등을 그대로 유지하되 빠른 속도를 붙여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원동력을 확보한 것이 하이얼의 성공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하이얼은 2012년에 일본 파나소닉 계열 산요전기의 세탁기·가정용 냉장고 사업 부문과 기존 브랜드인 '아쿠아'를 인수했다.

◆ 산요·GE 품고 사물인터넷(IoT) 시장 향하는 하이얼

산요, GE 가전 부문 인수로 세계 가전 시장에 강력한 인상을 남긴 하이얼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기존의 중저가용 가전 시장이 아니라 IoT 시장이다. 스마트홈 열풍과 함께 삼성전자, LG전자, 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는 '하이테크' 분야에 나란히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하이얼이 미국의 GE를 합병한 건 최대 시장인 미국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GE의 미래 기술을 흡수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

GE는 현재 전자업계에서 가장 앞선 스마트홈 솔루션을 선보이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보다도 한참 앞선 2000년대 초반에 지그비(ZigBee) 등 무선통식 방식을 이용한 스마트홈 솔루션을 개발해왔다. 2010년즈음에는 시스코(Cisco)와 손잡고 스마트그리드 개념을 업계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이후 소형 가전 전문 브랜드인 자스코를 통해 PC 주변기기와 각종 경보 시스템 등 스마트홈 관련 제품을 판매해온 전례도 있다.

올해 중국 선전에서 열린 가전박람회 'CE 차이나'에서 GE의 한 관계자는 "GE가 스마트홈 분야에서 선도적인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TV 등 대형 가전 제품을 직접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주목 받지 못했었다"며 "하지만 하이얼과의 합병을 통해 GE의 스마트홈 구현 솔루션을 하이얼의 가전 제품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됐다"이라고 설명했다.

산요의 핵심 기술과 인력을 흡수한 하이얼일본법인 하이얼아시아도 IoT와 클라우드를 연동한 새로운 서비스를 준비중이다. 하이얼아시아는 지난 9월 마이크로소프트(MS) 사와 함께 가전 및 업무용 기기와 클라우드를 결합한 가전 IoT 서비스인 '아쿠아(AQUA) 클라우드 IT 세탁' 개발에 협력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빨래방의 가동 상황 등을 빅데이터로 축적해, MS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애져(Azure)'와 연동시키는 서비스로 내년부터 시범 운영된다.

박승찬 소장은 "하이얼은 국내 업계 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한참 전부터 하이엔드 기술 시장 진입에 착실히 준비해왔고 정부의 지원 아래 연구개발, 생산라인 등을 고도화해 왔다"며 "특히 일본, 미국의 선진 기업들의 첨단 기술을 중국의 홍색공급망으로 낮은 가격, 빠른 시간에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