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직무대행서 책임지는 경영자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오는 27일 열리는 삼성전자 임시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에 오른다. 그동안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 신분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했지만, 권한만 가질 뿐 미등기임원 신분으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재계는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을 이끄는 실질적 오너인데, 언제까지 지배주주라는 명분만 앞세워 핵심 계열사를 장악할 순 없다”며 “공식적인 경영 참여 선언과 함께 이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등기임원이 아니면 이사회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지배주주가 암묵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편법경영을 하던 것에서 앞으로는 회사에 대한 책임도 다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이 이끄는 뉴 삼성은 책임경영에 속도를 내면서 주가 부양과 미래를 위한 준비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건희 회장 시대의 삼성이 과감한 의사결정과 천문학적 투자로 시장에서 선도적인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면, 오늘날 뉴 삼성은 주가를 관리하고 지분투자 같은 안정적인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높이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 같은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 11조가 넘는 돈을 자사주 매입·소각 같은 방어적 수단에 쓸 것이 아니라 리스크를 무릅쓰더라도 글로벌 인수합병(M&A)전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JY의 리더십 “위기때 피하지 않는다”...국민·주주 신뢰 확보가 우선

이건희 회장이 건재하던 시절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의 황태자’로 불렸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그룹 전면에 나서는 것이 낯설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내기보단 남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회사 일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쳤다.

하지만 삼성 안팎에서 볼 때 이 부회장은 더이상 회장 직무대행이 아니라 그룹을 이끄는 실질적 오너다. 그런 그에게 위기는 리더십을 시험하는 기회가 됐다.

지난해 6월 23일 삼성그룹의 대국민 메르스 사과 기자회견은 국민에게 ‘이재용’이라는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는데 충분했다. 그는 일부 참모들의 반대에도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직접 회견장에 나와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이 부회장은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했다. 그는 생애 첫 기자회견에서 사과문을 직접 읽어 내려가며 “저희 삼성서울병원이 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쳐드렸다. 참담한 심정으로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메르스 백신과 치료제 개발 지원도 약속했다.

실제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올해 2월 “국제백신연구소에 메르스 백신 개발 지원금 14억원을 전달했고, 향후 5년간 총 410억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올 2분기 8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면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올해 9월 ‘갤럭시노트7’ 리콜이라는 돌발 악재를 만났다. 삼성전자에 불어닥친 위기를 헤쳐나갈 해결사가 필요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이사회의 요청을 받아 등기이사 추천을 수락했고, 오는 27일 삼성전자 임시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동의를 받으면 이사회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상법에 따르면 등기이사는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정관을 위반하거나 임무를 게을리한 경우 회사와 연대해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이 부회장 역시 등기이사가 되면 법이 규정한 책임과 의무를 따라야 하며, 이사회에도 참여해 회사의 중요 결정에 직접 참여한다. 분기마다 보수도 공개해야 한다.

표=이병희

이 부회장은 등기이사 추천 발표 후인 올해 9월 21일 한 손에 ‘갤럭시노트7’을 들고 출근했다. 취재진이 몰리는 수요사장단회의가 열리는 날인데도 지하주차장으로 출근하지 않고, 당당히 삼성 서초사옥 1층 로비를 지나가면서 오너 마케팅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재계 관계자는 “이제 이재용 부회장에게 남은 과제는 회장에 취임하는 것”이라며 “그룹 승계를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는 상황에서 회장이 되는 건 시간의 문제일 뿐”라고 말했다.

◆ 주가 높이고 대형 기업공개 잇따라...미래 위한 결정적 한방은 어디에

뉴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 확립을 위해 계열사 기업공개(IPO)와 합병 작업을 진행했다. 아울러 주주 신뢰를 얻기 위해 주가관리에도 신경을 썼다.

2014년 11월 삼성SDS를 시작으로 같은해 12월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공모금액만 2조~3조원으로 평가되는 삼성물산의 자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연내 상장을 준비중이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이재용 부회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삼성SDS는 이 부회장이 9.2%의 지분을 가진 회사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삼성SDS 지분이 향후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 주목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삼성SDS의 주식을 섣불리 매각할 경우 주가하락으로 이어져, 삼성SDS 주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은 부담요인이다.

제일모직은 현재 삼성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통합 삼성물산에 흡수합병됐다. 이재용 부회장(17.08%)은 통합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다. 통합 삼성물산이 최대주주인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주식시장에 상장하게 되면 통합 삼성물산의 성장 기대감을 높여, 오너 일가의 주식가치 상승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통합 삼성물산을 통해 그룹을 지배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의 지분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부회장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은 0.59%에 불과하다. 현재 삼성전자의 주가가 안정적이라 문제가 없지만 주가가 하락하거나 요동칠 경우 과거 엘리엇처럼 외국인 투자자가 오너의 낮은 지분을 문제로 삼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주주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4회에 걸쳐 11조3000억원 규모의 특별자사주 매입·소각을 실시했다. 회사측은 “특별 자사주 매입·소각을 통해 주가가 약 20% 상승(2015년 10월 28일 130만8000원->2016년 9월 26일 156만8000원)하는 효과를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김영준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애플이나 인텔 같은 IT기업들도 대규모 투자에 따른 수익이 보장되지 않을 때는 주주환원 정책을 편다”면서도 “11조면 100억달러가 넘는 큰 액수인데, 시장에서 프리미엄을 가진 플레이어를 M&A 할 수 있는 성숙된 기업문화가 아쉽다”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중국 BYD에 지분투자를 하고, 미국 실리콘밸리 유망 기업을 인수하는 등 미래 사업 발굴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시장의 판을 흔들 결정적인 한방이 없다”면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수뇌부가 주가관리뿐 아니라 과감한 결단력을 보일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