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세운 상가 5층 중앙정원에 9월 21일부터 9월 28일까지 이색 전시회가 열렸다. '꽃, 시간의 강을 건너 시간과 만나다'란 주제의 이 전시회는 대학에서 공대(연세대 기계공학과) 출신의 플로리스트 손은정씨(39·사진 왼쪽)가 열었다. 세운상가 복원 움직임이 활발한 가운데 열린 이번 전시회에서 손 씨는 1940년대 진공관 라디오, 아이팟 등등 각종 전자기기를 꽃으로 장식했다.
이 전시회를 봤다는 고산 '팹랩서울(FAB LAB SEOUL)' 대표는 "이런 이벤트들이 세운상가를 쇄신하고 새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실질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2011년 12월 세운 상가 550호에 입주했다.
9월 28일 전시회를 마친 손 플로리스트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손 씨는 졸업 후 다국적 정보기술(IT) 회사인 시스코코리아에 입사, 한국과 싱가포르 등에서 일했고 2010년부터 LG전자 프랑스 법인에서 근무했다. 플로리스트로 변신한 것은 프랑스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다. 그는 2013년부터 꽃을 이용한 디자인컨설팅업체 '수다 F.A.T'를 운영 중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
"10년 넘게 회사 생활을 했다. 2010년에 회사 장기 프로젝트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당시 주말에 원데이 수업을 들으면서 꽃을 배웠다. 한국으로 복귀한 후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에 갔다. 그게 2011년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의미 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 생활이 의미가 없어졌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아버지의 죽음과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이 일을 진정으로 하길 원하는가?'라고 물었던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꽃을 배워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든다.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 이번 전시회를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내 작품과 메타기획이 세운상가를 보는 관점이 통하는 게 있었다. 메타기획은 세운상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컨설팅 회사다. 그래서 함께 전시회를 기획하게 됐다. 난 꽃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꽃과 사람이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플로리스트로서 몇 년 동안 꽃에 사람의 삶과 모습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애정을 품고 있는 '기술(Technology)'과 꽃을 결합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기술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크고 작은 전시를 기획해왔다. 사실 내가 운영하는 업체의 이름도 '수다 F.A.T'다. 수다는 손이 많다(手多)는 뜻이고, FAT는 각각 플라워(Flower), 아트(Art),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앞글자에서 따왔다."
―이번 전시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운상가는 우리나라의 전자·IT(정보통신) 산업의 근간이 된 의미 있는 장소다. 이곳에서 기술과 사람이 공존하는 모습을 꽃으로 표현했다. 70년대 가전제품과 80년대 중반~2000년 초반의 데스크톱 PC, 이후 등장하는 노트북과 모바일, 무선 인터넷 기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클라우드를 꽃으로 표현했다. 세운상가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 요소다. 기술로 인한 삶의 변화를 꽃으로 표현한 설치 작품은 이 전시회가 처음이지 않을까 한다. 사람과의 소통도 작품에 담았다. 관람객을 만나면서 이 행사의 의미가 더욱 커졌다. 만족스러웠다."
―전시회 반응이 좋았다.
"처음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다녀갈까 싶었다. 그런데 상가에 계시는 분들의 반응이 좋아서 힘이 됐다. 방문객보다는 세운상가에 계시는 분들이 많이 봐주셨으면 했다. 처음 준비 과정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상인분도 꽃이 들어오니 관심을 보였다. 미소를 띠며 내게 뭐 준비하느냐고 물어보시기도 했다. 어떤 분은 간식과 음료수도 사주시며 격려해주셨다. 전시 내내 가장 큰 지지자이며 관람객은 세운상가 거주자인 기술자와 상인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회가 페이스북을 타고 알려지고, 입소문도 나면서 상가 이외의 분들도 전시회를 많이 찾아주셨다. 마지막 날까지 많은 사람이 관람했다. 철거 하는 날 오신 분들도 있었다. 아쉬워하며 돌아가시기도 했다."
―전시회를 마친 소감은 어땠나. 기억에 남는 장면도 같이 꼽아 달라.
"난 예술과 기술이 '일상 속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회는 내 생각보다 더 풍성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72세의 이승근 기술 장인님이 본인이 소유하신 1940년대 진공관 AM 라디오를 빌려주신 것이다. 이 기술 장인님은 작품을 관람하시다가 갑자기 '여기는 오래된 세운상가 물건이 있으면 좋겠다'하면서 아이디어와 라디오를 빌려주셨다. 이 기술 장인님은 50년 동안 세운상가에 계셨다. 세운상가 역사 그 자체를 사신 분이다.
작품도 완성되고 개회식도 끝난 상태였지만, 난 진공관 AM 라디오를 작품 맨 가운데에 아이팟과 함께 두었다. 1940년대의 라디오와 2000년대의 아이팟. 음악을 들려주는 당대의 혁신이 만난 것이다. 또 70대 기술 장인과 청년, 엔지니어 출신의 내가 만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기도 했다. 화룡점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시회의 제목이 '꽃, 시간의 강을 건너, 시간과 만나다'인 만큼 진공관 라디오를 놓는 과정 자체가 내가 표현하는 작품 일부였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계속 작품 활동을 할 것이다. 언제나 꽃으로 시간과 기술, 사람을 표현할 것이다. 다양한 기업과 협업도 하고 싶다. 꽃은 힘이 있다. 꽃을 통해 소통을 끊임없이 표현하겠다."
―세운상가 발전에 관한 의견 한마디 부탁한다.
"세운상가야말로 시간과 기술 장인들이 모여있는 서울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세운상가는 옛 전성기 때, '세운상가에 가면 전투함도 마징가Z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기술자와 예술가가 세운상가를 지켜온 오래된 기술자들과 함께 협업한다면, 세운상가는 전성기를 다시 맞이할 수 있다고 본다. 꽃은 축복을 알린다. 이번 전시회의 꽃 작품이 세운상가 번영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