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도입 취지는 좌파적 이지만, 방식은 우파적인 독특한 제도다. 소득 불평등 완화를 위해 전 국민에게 돈을 준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사회주의 제도 같지만, 정부가 담당하던 선별적 복지제도를 시장 자율에 맡겨 복지 효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우파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다. 저출산, 노인 빈곤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이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아주 어려운 문제다. "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천정배 국민의당 의원)

20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중 절반 이상은 “기본소득을 한국에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비즈가 기본소득과 관련성이 높은 3개 상임위 소속 의원 37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54%(20명),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46%(18명)였다. 기본소득에 대해 잘 모르거나 당론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응답을 거부했거나 하지 않은 의원 27명은 제외했다.

국회 기재위 복지위 환노위 소속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54%가 기본소득을 한국에 도입해야 한다고 답했다.

◆ “저출산·노후 빈곤 문제 해결할 합리적 대안”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소속 의원들은 상당수가 기본소득에 대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천정배 국민의당 의원은 "농어촌 복지 예산이 집행되는 과정을 보면 전달되는 과정에서 낭비되는 돈, 비효율이 상당해 차라리 직접 나눠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저출산,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동수당, 노인수당을 우선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의견이 반으로 갈렸다. 아직 당론이 정해지지 않은 만큼 개인의 견해가 반영된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기존 복지제도의 비효율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 의원들이 ‘빈부 격차 완화’나 ‘국민소득 증가를 통한 경제 성장’,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자리 감소에 대응’을 도입 이유로 든 것과는 달랐다. 똑같이 기본소득에 찬성하면서도 여야 정당의 시각이 명확히 나뉘었다.

반대 의견을 밝힌 의원들은 기본소득이 현재 복지체계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며, 재원 마련도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근로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은 "기본소득이 기존 사회 안전망을 대체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위험한 생각이다"라면서 "낙오되는 사람이 더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 일부 의원들은 기본소득을 반드시 도입해야 하는 제도로 판단하고 내부적으로 스터디에 나선 상태다. 더민주당의 한 국회의원실 관계자는 "기본소득을 조만간 정책 아젠다로 추진하기 위해 어떻게 도입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왜 지금 기본소득 인가

1516년 토머스 모어가 처음 떠올린 ‘기본소득’을 5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 낸 것은 로봇과 인공지능이다.

지난 6월 초,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둔 스위스 시내에 기본소득(Revenu de Base Inconditionne) 찬성 투표를 호소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기본소득 덕분에 삶을 선택한다”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토머스 모어의 책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포르투갈의 여행자 라파엘 논센소는 "도둑을 줄이려면 교수형 같은 끔찍한 처벌을 가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이후 학계에서 간간히 논의되던 기본소득은 지난 1972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이 '연 1000달러 기본소득'을 공약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토빈세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의 아이디어였다.

지금 다시 기본소득이 회자되는 것은 4차 산업혁명 영향이 크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4차 산업혁명으로 전통적 노동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는 가운데, 전세계를 무대로 한 구글과 같은 초대형 플랫폼 기업이 전세계의 부(富)를 빨아들이는 상황이 고착화 되면서 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부자들의 주머니는 두툼해지지만 중산층은 추락하고, 의식주 등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돈 조차 마련하기 힘든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① 전통적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사회

경제 전문가들은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전통적 의미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지는 사회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 한다. 정보 경제학자인 에릭 브린욜프슨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슬론경영대학원 교수와 앤드루 맥아카피 MIT 부교수는 저서 ‘제2의 기계시대’에서 "인간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는 기계가 더 발달할수록, 비슷한 기능을 지닌 인간의 임금은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요리를 제외하고 인간 노동자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가 개발된다면, 요리사를 하려는 사람이 폭증 하면서 총 임금이 줄어들 것"이라고 도 했다.

시가총액이 1787조원에 달하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의 정직원 수를 모두 합하면 2013년 기준으로 22만7056명인데, 시총 216조원인 삼성전자(27만5133명)보다 적다. 미래의 구글, 애플을 꿈꾸는 실리콘밸리의 젊은 벤처기업들은 덩치를 키우는 대신, 어떻게 하면 기술력으로 인력을 대체해 삼성전자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의 칼 베네딕트 프레이 교수와 마이클 A. 오스본 교수가 2013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향후 10년 내에 미국 일자리의 47%가 자동화 될 것으로 분석됐다. 이들은 회계, 감사 업무는 훨씬 싸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로봇이 맡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관리자, 법률 보조원, 은행원 등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를 하는 직업도 로봇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타격을 크게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작년 2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산업용 로봇이 생산에 널리 쓰이게 되면 일자리가 가장 많이 대체될 국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18개국 중 한국을 1위로 꼽았다. 로봇이 대체하기 쉬운 제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는 지난 7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노동의 종류를 ‘다음 업무를 예측 가능한 지’ 여부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눴다. 맥킨지는 “예측이 가능한 일자리는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해 78%가 대체되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25%만 대체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측이 가능한 직업이란 용접공, 납땜공, 음식 준비, 포장 등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는 일을 하는 직업을 말한다.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건설 노동자, 숲 관리, 동물 사육사 등 업무가 반복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경우를 뜻한다.

② 전세계를 무대로 한 플랫폼 기업의 등장

구글의 지도 앱인 '구글 맵'은 이용자가 전세계를 마치 자기 집 앞처럼 누비고 다닐 수 있도록 해준다. 스마트폰 이용자가 GPS를 켜고 본인의 위치를 인식하도록 하면, 가려는 위치까지 가장 빠른 경로를 계산해 알려준다. 구체적으로 100m 앞에서 좌회전, 그 다음 두번째 블록까지 직진한 뒤 길 건너 우회전 등 아주 세세한 위치 정보를 알려줘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도 길을 헤매지 않도록 도와준다.

구글은 검색, 유투브, 안드로이드 등 인터넷 사업을 통해 작년 280억달러(31조35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국내에서는 정부가 안보 상의 이유로 지도 반출을 거부하고 있어 반쪽 짜리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상당수 국가에서는 구글 맵이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작년 기준으로 구글의 핵심사업인 검색과 유튜브, 안드로이드 등 핵심 인터넷 사업의 매출은 전년 대비 14% 늘어나 754억달러(84조4500억원)를 넘어섰다. 영업이익은 23% 증가한 280억달러(31조3500억원)에 달했다. 구글의 지주회사인 알파벳은 올해 초 미국 뉴욕 주식시장에서 애플을 제치고 시가총액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구글 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해 있지만, 전세계를 무대로 돈을 번다. 특히 세금이 낮은 나라에 총괄본부를 두는 방식으로 각국에서 내야 할 세금은 거의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일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리는 데도 크게 관심이 없다.

공유경제를 통해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에어비앤비와 우버도 사정은 비슷하다. 에어비앤비는 앱을 통해 방을 빌려주려는 사람과 빌리려는 사람을 연결하고 수수료를 받는다. 에어비앤비는 지난 2008년 창업한 지 8년 만에 당당히 기업 가치 기준으로 세계 유명 호텔 체인 1~3위(힐튼·메리어트·하얏트)와 순위를 다투는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인 비상장 창업 초기 기업)'이 됐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지난해 12월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 '우버'의 기업 가치가 680억달러(78조3360억원)로, 미국 자동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의 가치를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창업 5년 만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GM을 따라잡았다는 것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부상하는 플랫폼 기업은 세계 각국에서 번 돈을 대부분 자국으로 가져간다. 각국에 사무실 조차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대체로 세금을 낼 의무를 적용 받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업이 자국에 들어오는 것이 국민들에게는 크게 반길 일이 아니다.

③ 양극화 심화…생활비에 허덕이는 중산층

전통적 노동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 상황에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글로벌 대기업 조차 일자리 만들기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이매뉴얼 사에즈(Emmanuel Saez)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교수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미국에서 소득 상위 1%의 실질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4년 21.4%에서 작년 22.0%로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소득 상위 1%는 작년 평균소득이 136만달러로 2009년부터 6년 간 37% 증가했다. 하위 99%도 소득이 증가했지만 7.6% 늘어나는 데 그쳤다. 지난해 평균소득은 4만8800달러였다. 2009~2015년 미국에서 늘어난 소득의 52%는 상위 1%에게 돌아갔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소득 상위 1%는 지난 2013년 연평균 3억7840만원을 벌었는데 5년 전인 2008년과 비교해 1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상위 20%가 9.8%, 상위 40%가 6.5%, 하위 20%가 9.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정부가 제공하는 선별적 복지제도는 소득 격차를 좁히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소득이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절대 빈곤층’은 약 179만 가구다. 그런데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가구는 83만가구에 불과하다.

작년 2월 서울 송파구에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돼 사회에 충격을 줬다. 딸은 중병을 앓고 어머니는 다쳐 수입이 없었지만 직전 해에 월 133만원 이상 벌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난 2014년 발생한 ‘송파 세모녀’ 사건은 현 복지제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서울 송파구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해 사회에 충격을 줬다. 이들은 봉투에 월세와 공과금 70만원을 넣고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들은 기초생활수급 혜택을 받지 못했다. 본인들이 신청을 하지 않기도 했지만, 신청을 했어도 당뇨와 고혈압을 앓는 큰딸과 신용 불량자인 둘째 딸이 근로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급 요건을 단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혜택을 주지 않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구조 때문인데, 이 사건 이후 국회에서는 모든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일부라도 기초수급 지원을 해주는 법 개정안을 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혜택에서 소외된 빈곤층이 상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제도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선별적인 기존 복지제도는 사각지대를 만들고, 수혜자를 골라내기 위한 행정비용이 들어가지만 기본소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기본소득은 대안이 될 수 있나

지난 6월 5일(현지시각) 스위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을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전세계인이 기본소득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투표결과 76%의 국민들이 기본소득 도입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투표를 주도한 스위스 시민단체는 ‘성공적이며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의 칼 위더퀴스트 공동의장은 "이번 국민투표의 목적은 기본소득에 대해 스위스인과 전세계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의 플랑팔레 광장에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설치됐다. 이 현수막은 6월 5일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앞두고 기본소득 지지자 모임에서 제작했으며 가로 72m 세로 110m 크기다. 제작에 총 20만5036달러(2억2700만원)가 들었다.

스위스는 유럽 주요국 중 재정건전성이 튼튼하고 실업률도 6% 미만으로 낮은 편이다. 살인적인 물가로 알려져 있지만 최저임금이 그만큼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의 시민단체가 국민투표를 추진 하게 된 계기는 역시 로봇과 인공지능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이다.

이번 국민투표를 기획한 체 바그너 BIS(Basic Income Switzerland) 대변인은 “앞으로 로봇으로 인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생겨날 텐데 기본소득은 이런 무(無)임금 일자리를 보다 가치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면서 “또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돈(월급) 이외에 다양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해 스위스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상당했다. 스위스 정부는 기본소득 지급이 국가 재정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정치권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이민자들이 급격하게 유입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스위스에서 일하는 다니엘 칼트 UBS 이코노미스트는 "스위스 고용률은 높은 편이고 기술 진보 보다는 스위스 프랑의 가치 상승이 직업에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사람들은 이런 급진적이면서 드라마틱한 실험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