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지하 금고에서 평소보다 많은 돈을 꺼내 시중 금융기관에 공급한다. 추석 때는 현금 수요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은 오랜만에 본 손녀, 조카들에게 용돈을 주기 위해 미리 현금을 인출하고,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명절 상여금을 지급하기 위해 현금을 필요로 한다. 차례상을 준비하기 위해 현금 사용 비중이 높은 재래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아진다.
17일 한은에 따르면, 올해 추석 연휴 전 10영업일(8월 31일~9월 13일) 동안 한은이 금융기관에 공급한 화폐(순발행액)는 4조8559억원으로 추산됐다. 이는 지난해 추석 때보다 2.8%(1332억원) 늘어난 액수다. 올해 추석 연휴가 5일로 지난해보다 하루 길어지면서 현금 수요가 더욱 늘어난 영향이다.
한은은 이 많은 돈을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내고, 어디에 보관하고 있을까?
◆ 지폐는 종이가 아닌 100% 면에 인쇄…2006년 신권 등장
돈의 일생은 한은이 경상북도 경산에 위치한 한국조폐공사에 화폐 제조를 발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얼마나 많은 돈을 만들지는 매년 화폐 발행량, 환수량, 폐기량 등을 고려해 정한다. 지폐의 경우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모습이 되기까지 8단계의 공정을 거치는데, 총 40~45일이 걸린다.
먼저 전지에 바탕 그림(지문)을 인쇄한다. 돈을 만들 때 사용되는 전지는 종이가 아니다. 100% 면이다. 이때문에 물에 젖어도 그 형태가 보존된다. 5만원권을 예로 들면 전지 한 장에 28장의 5만원이 들어간다. 전지 한 장으로 140만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탕 그림이 찍히면 5~7일 간 잉크를 말린 뒤 금액을 표시하는 스크린 인쇄 단계를 밟는다.
금액이 표시되고 나면 위변조를 막기 위해 홀로그램을 부착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5만원권의 띠형 홀로그램에는 상, 중, 하 세 곳에 무늬가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 문양, 4괘 무늬가 하나씩 들어가 있다.
이들 무늬는 보는 각도에 따라 뒤바뀐다. 처음 봤을 때 위에서 부터 지도-태극-4괘의 순서이던 무늬가 조금 비스듬히 보면 태극-4괘-지도의 순서로 보이는 식이다. 무늬 사이에 숫자 '50000'이 세로로 쓰여있다. 5만원권에는 이 같은 위변조 방지 장치가 22가지 담겨 있다.
액면숫자와 홀로그램까지 부착하고 나면 인물과 글자를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만드는 요판 인쇄 과정을 거친다. 시각장애인도 화폐 액수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화폐 고유 번호를 부여하는 활판 인쇄와 검수, 절단 과정 등을 모두 마치면 완성이다.
지금과 같은 모습의 지폐(신권)가 등장한 것은 지난 2006년부터다. 1983년 이후 23년만의 교체였다. 5000원권을 시작으로 2007년 1만원권, 1000원권이 신권으로 교체됐고, 2009년 5만원권이 처음으로 탄생했다. 당초 5만원권과 함께 10만원권도 출시될 예정이었지만, 지하경제가 활성화할지 모른다는 우려로 10만원권 발행 계획은 2009년 1월 중단됐다. 10만원권의 표지 모델은 김구 선생이었다.
◆ 한은 지하금고 속 '10조원'…내년 사상 최대 '현금수송작전' 펼쳐진다
조폐공사에서 만들어진 돈은 가장 먼저 한은으로 들어온다. 사실 지금까지는 엄밀히 말해 돈이라고 말할 순 없다. 시중에 유통되지 않아 통화량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식 명칭은 발행준비자금이다. 한은 금고를 떠나 시중에 풀려야 진정한 돈이 된다.
발행준비자금, 회수된 화폐 등 한국은행에 쌓여있는 돈은 최대 10조원으로 추정된다. 보통 사과 상자 1개를 5만원권으로 채우면 최대 25억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최소 약 2만개의 사과상자가 있어야 모두 담을 수 있는 양이다.
그렇다면 이 돈은 한은 어디에 보관돼 있을까. 답은 한국은행이 화폐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구관 지하에 있다. 대략적 위치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위치와 규모, 경비 등 한은 지하 금고에 대한 사항은 모두 국가 기밀이다.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고, 한은 발권국 직원들이 돌아가며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한은 주요 재산 중 하나인 '금괴'는 한은이 가지고 있지 않다. 지난해 말 기준 한은의 금 보유량은 약 104톤에 달한다. 과거엔 한은 대구 본부에 보관해뒀지만, 북한과의 대치 상황 등 지정학적 리스크를 우려해 지난 2004년 이후 모든 금괴를 영국 런던에 위치한 영란은행으로 옮겼다.
한은이 지하 금고에 금괴를 보관하지 않는 데는 역사적 아픔도 얽혀있다. 한은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이틀 뒤인 6월 27일 서울 본점에서 금 1070kg과 은 2500kg을 군 트럭에 싣고 경남 진해 해군통제부로 옮겼다. 그러나 당시 금 260kg과 은 1만6000kg은 미처 옮기지 못했는데, 북한이 서울을 점령해 모두 가져가 버렸다.
한은이 건물 개·보수를 위해 내년 6월 태평로에 위치한 삼성 본관으로 옮겨가면서, 지하 금고 속 '10조원'도 함께 자리를 옮기게 됐다. 건물 리모델링과 함께 지하에 분산돼 있는 여러 금고도 효율적으로 재배치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10조원의 임시 거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곳은 서울 강남본부다. 한은 본점과 약 8.6km 떨어져 있어 지역 본부들 중 가장 가깝다. 한은은 거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10조원이라는 거액을 옮기기 위해선 사상 최대의 현금 수송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거리가 짧을수록 위험이 줄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남본부의 금고 공간이 부족하면 각각 31km, 33km 떨어진 경기, 인천본부의 금고도 빌려야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1만원권 수명 8년 4개월…훼손 지폐는 자동차 방진재로 재활용
다시 돈의 일생으로 돌아와 보면, 돈은 발행→유통→환수→정사→폐기 등의 수명 주기를 거친다. 조폐공사에서 발행돼 '발행준비자금'이라는 이름으로 한은 지하 금고를 찾았던 돈은, 한은 정문을 나서는 순간 유랑을 시작한다.
돈은 가장 먼저 시중 금융기관에 공급된다. 금융기관들은 한은 전산망에 자금 인출 계획을 미리 알리고 한은에서 돈을 찾아간다. 국민들은 각자 거래하는 금융기관에서 돈을 찾아 사용한다. 이 과정 속에서 돈은 탈세를 위해 땅 속에 묻히기도 하고, 훼손되기도 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다.
땅 속에 묻힌 돈은 어쩔 수 없지만, 훼손된 돈은 다시 한은으로 돌아온다. 금융기관이 한은에 주거나, 국민들이 직접 한은에 위치한 화폐교환창구를 찾아 주기도 한다. 훼손된 돈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한은 정사실이 결정한다. 한은 정사실에 비치된 자동 정사기는 33초만에 1000장의 지폐를 감별할 수 있다. 하루 평균 약 40만장 지폐의 생사를 결정한다.
재사용이 가능하다고 판단된 지폐는 100장 단위로 정리돼 다시 배출된다.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지폐는 분쇄, 압축 과정을 거쳐 종이 뭉치로 배출된다. 지난해 한은이 금융기관과 한은 화폐교환창구에서 회수해 폐기한 지폐와 동전의 액면 금액은 총 3조3955억원에 달한다. 폐기된 화폐는 6억장에 달하며 5톤 트럭 112대분에 해당한다. 이를 쌓을 경우 백두산 높이의 23배, 에베레스트 산의 7배, 모두 연결할 경우 경부고속도로를 약 103회 왕복할 수 있는 물량이다.
그러나 돈의 생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폐가 면으로 만들어지다보니 폐기되더라도 여러 분야에서 재활용될 수 있다. 과거엔 주로 건축용 바닥재로 활용됐지만, 최근엔 자동차 트렁크 안의 방진재(흔들림을 줄이는 부품)로 사용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1만원 지폐 수명은 8년 4개월, 5000원 지폐 수명은 5년 5개월, 1000원 지폐 수명은 3년 4개월이다. 2009년부터 발행된 5만원권은 아직 유통기간이 길지 않아 수명을 측정할 수 없지만, 한은 관계자들은 5만원권 수명이 적어도 1만원권보다는 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