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서울 간선도로. 우측으로 빠지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측에서 차량이 연이어 달려와 빈틈을 주지 않았다. 방향지시등을 켰지만, 우측 뒤에서 달려오던 차량은 경적을 울리며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해왔다. 겨우 원하는 차선에 진입해 한숨 돌렸지만, 경적을 울리던 뒷 차량이 순식간에 앞을 막아서며 다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자신의 진로를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시내버스를 쫓아가 보복운전을 하려는 승용차가 주변 차량의 블랙박스에 찍힌 모습.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보복운전’의 한 모습이다. 2015년 4월부터 경찰청이 보복운전 신고 건수를 집계한 결과 2015년 4~6월까지 100건도 채 되지 않았던 보복운전 신고 건수가 2016년 2~3월에는 약 500건으로 급증했다. 층간소음 분쟁으로 살인을 서슴치 않는 흉흉한 소식도 들린다. 상대방이 무시하는 것 같아서 무분별한 폭행을 저질렀다는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 2~3년 동안 한국 사회는 분노조절장애라는 집단 병리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8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서울 과총회관에서 ‘분노조절장애,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정신의학, 사회심리학, 뇌과학, 진화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른바 ‘분노조절장애’로 불리는 사회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해석을 내놨다.

서울 과총 회관에서 최근 열린 ‘한림원탁토론회’

◆ 분노조절 문제는 아동기 시작...올바른 부모-자녀 관계 만들어야

정신의학이라는 학술 관점에서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정신의학에서 분노는 ‘무언가 잘못 되어있다고 인지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이나 부정적인 감정’으로 정의한다. 엄밀히 말하면 의학 진단 용어에서 분노조절장애란 말은 없다. 정확한 진단 기준이 없는 것이다. 정신과 진단의 관점에서 분노조절장애는 ‘파괴적, 충동조절 및 품행장애’에 포함되는 ‘간헐적 폭발장애’와 가장 가깝다.

정신의학에서는 언어적 공격성, 재산·동물·타인에게 가하는 신체적 공격성이 3개월 동안 일주일 평균 2회 이상 나타날 때 간헐적 폭발장애로 진단한다. 또 재판 피해나 파괴, 동물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폭행을 포함하는 폭발적 행동을 12개월 이내에 3회 이상 해도 같은 진단을 받는다.

간헐적 폭발장애의 핵심은 증상이 6세부터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원인으로는 불안이나 정서 조절이 어려울 때, 아버지의 육아 부재나 방임 등이 거론된다. 특히 아동기에 받은 학대가 간헐적 폭발장애로 나타나는 공격성의 원인 중 15%에 이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김재원 서울의대 교수는 “부모-자녀 관계나 어린 시절 가족과의 상호작용이 분노조절 문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많다”고 말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허용적 육아 태도는 공격성이나 충동성을 조절하기 어렵고 욕구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잘 견디지 못한다. 또 권위주의적인 육아 방식은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좌절감을 유발해 분노폭발을 유도하기도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 인간은 영장류보다 분노조절 잘하도록 진화...뇌과학적 해결 방안 모색해야

토론회에 참석한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진화생물학자)는 인간은 영장류보다 훨씬 분노를 잘 조절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고 밝혔다. 장 교수는 “10여 년 전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세계적인 영장류 학자 제인 구달 박사께 인간과 침팬지의 폭력 차이점에 대해 물어본 적 있다”며 “기대한 대답은 인간의 폭력이 훨씬 고도화되고 잔인하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만약 침팬지에게 총을 쏘는 기술을 가르쳐 주면 인간보다 많은 살상을 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침팬지는 인간보다 훨씬 폭력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분노는 정상적인 감정이다. 생존과 번식에 방해받는 요인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진화학자들은 다만 분노를 조절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심리적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장 교수는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다른 점은 함께 살아가는 집단의 규모가 매우 큰 것”이라며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활개를 치면 거대한 집단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소셜 브레인’ 이론이 현재 이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말했다.

뇌과학자들은 뇌에서 분노를 유발하는 부위와 억제하는 부위를 명확히 규명하고 분노 조절 실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재진 연세대 의대 교수는 “뇌에서 안와전두엽이나 복내측전전두피질의 기능이 약화되면 분노조절이나 폭력 유발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분노 조절의 경우 한국인의 뇌와 일본인, 서양인의 뇌가 어떻데 다른지 연구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 한국사회 전체가 느끼는 좌절감이 분노 조절 문제 일으켜

심리학에서는 ‘분노’를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이해한다. 핵심 이론은 ‘좌절-공격 이론’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 방해를 받으며 느끼는 좌절감 때문에 분노가 생긴다는 이론이다. 차가 막히면 화가 나는 것도 제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문제는 ‘합리화되지 않는 좌절’과 ‘박탈감’이다. 합리화되지 않는 좌절의 경우 지하철에서 발을 밟히는 상황으로 설명된다.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지하철에서 누군가 자신의 발을 밟으며 고통을 주면 좌절감으로 인해 분노가 생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들면 분노를 조절한다. 그러나 텅 빈 지하철에서 누군가 와서 발을 밟는다면 합리적인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서울 지하철 노선 중 출퇴근 시간대 상당히 복잡한 여의도역 9호선에서 복잡한 열차로 승객들이 힘겹게 타고 있다. 발을 밟히더라도 분노를 조절할 수 있을 만한 합리적인 상황이다.

원하는 것이 부족한 상태인 박탈과 다른 사람보다 적게 가진 상대적 박탈, 앞으로 더 가질 수 있다는 기대에 현실이 못 미칠 때 느끼는 박탈감도 분노를 유발하는 심리학적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한국인의 문화심리학적 특성과 심리학의 좌절-공격 이론이 결합하면서 최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진단한다. 한국인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미래에 뭔가 이뤄낼 수 있다는 비현실적 낙관성이 있기 때문에 쉽게 좌절을 느끼고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이다.

이번 토론회에서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과 일본인, 서양인 등의 사회심리학적 연구를 살펴 보면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영향력을 남에게 관철시키려는 주체성이 강하다”며 “주체성이 높은 한국인들은 최근의 경제 위기나 양극화 현상, 이른바 ‘헬조선’으로 대변되는 사회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는 좌절감으로 분노가 사회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과도한 좌절감과 억울함, 주체성을 깎아내리는 무시받는 느낌은 살인 사건 등 극단적인 현상으로 이어진다. 허 교수는 “실제로 국가과학수사연구원의 과학적범죄분석시스템에 따르면 2006년부터 올해까지 발생한 917건의 살인 사건 중 절반 이상이 어떤 이유에서든 무시당한다는 느낌으로 인한 분노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