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선박들이 미국 항만에 짐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한진해운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로 촉발된 물류대란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주(州) 뉴어크 소재 연방법원이 한진해운 선박에 대한 ‘압류금지조치(스테이오더)’를 확정한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롱비치 항만 인근에서 대기하던 선박 ‘한진 그리스’가 이날 자정부터 하역작업을 시작했다. ‘한진 그디니아’, ‘한진 정일’, ‘한진 보스턴’ 등 나머지 선박 3개도 순차적으로 컨테이너를 항구에 내릴 예정이다.

앞서 뉴어크 소재 연방법원은 지난 6일 자금 조달 계획서 제출을 조건으로 자산 압류 금지를 잠정 승인한 바 있다. 이후 서울중앙지법 파산부가 1000만달러(110억원)를 한진해운 선박에 대한 미국 항구 하역 작업 비용으로 쓸 수 있도록 하면서 스테이오더 요구가 최정적으로 승인됐다.

정부는 “사태 해결까지 시간이 걸리는 사안이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조금씩 잡혀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그러나 한진해운이 당장 선박 압류를 피했더라도 정상적인 하역 작업을 하려면 여전히 추가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진그룹의 한진해운 600억원 자금 지원도 난항 끝에 일단락짓기는 했으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진그룹 주력 계열사 대한항공은 10일 오전 사흘 연속 이사회를 연 끝에 한진해운의 롱비치터미널 지분 54%를 먼저 담보로 취득한 뒤 600억원을 대여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한진해운이 이 담보를 대한항공에 제공하기 위해선 해외금융회사 6곳과 세계 2위 해운사인 MSC의 동의를 모두 받아야 한다. 이해관계자가 많기 때문에 동의 절차에 오랜 시간이 걸려 600억원이 실제 지원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물류대란으로 피해를 입은 화주들과의 소송 문제도 남아 있다. 미국 법원의 스테이오더 수용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남아 있는 숙제가 적지 않다.

한진해운 여의도 본사

◆ 해상 대기 중인 41척 집중 관리…하역비 문제 해결 남아있어

해운업계에서는 미 법원이 스테이오더를 인정한 만큼 입항 거부로 바다에 떠있는 한진해운 선적의 화물 연착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앞서 일본 도쿄지방재판소도 지난 5일 압류강제집행 금지명령을 내렸고 영국은 지난 6일 스테이오더를 발효했다. 한진해운은 이번주 중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등에서 스테이오더를 신청할 예정이다.

한진해운 관련 정부 합동 태스크포스(TF)는 지난 10일 한진해운 컨테이너선 97척 가운데 하역 작업이 필요한 집중 관리 선박 41척을 선정했다. 싱가폴(17척), 미국 롱비치(3척), 시애틀(2척), 뉴욕(2척), 독일 함부르크(2척), 스페인 알헤시라스(5척), 멕시코 만젤리노(1척) 인근에 떠있는 선박 등이 대상이다.

이밖에 정부는 36척을 부산, 광양 등 국내 항만으로 복귀를 유도하고 있다. 나머지 20척은 이미 부산‧광양 등 국내 항만과 중국‧베트남 등 해외 항만에서 이미 하역 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한진해운 선박이 압류 우려 없이 항만에 접안하더라도 별도의 하역비용이 필요한 상황이다. 컨테이너선이 항만에 배를 대고 화물을 내리려면 도선사,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래싱(컨테이너와 컨테이너를 고정하고 해제하는 작업), 검수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이후 국내외 각 항만에선 통관 및 하역 관련 비용 문제로 한진해운 선박의 입항이 거부됐었다. 현재 바다에 떠 있는 한진해운 선박이 하역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1700억원으로 추산된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김진정 변호사는 “한진해운 사태를 마무리하려면 유류업체에 지불할 미지급금, 터미널 업체에 지불할 하역비, 철도운송비 등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며 “한진그룹의 긴급지원자금 1000억원은 마른 땅에 물 뿌리기에 불과해 채권단과 정부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했다.

현대상선의 첫 대체 선박 현대 포워드호가 9일 부산항 신항에 입항하고 있다.

◆ 국내 대기화물 운송 문제 해결 기미…현대상선 대체 선박 투입에 2M도 합류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시작된 국내 수출입업체들의 물류대란도 해소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현대상선은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화물을 운송하지 못하게 된 화주들의 요청에 따라 4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4척을 미주 노선에 긴급 투입했다. 지난 9일 첫 번째 대체 선박인 ‘현대 포워드’가 부산에서 화물을 싣고 출발했다. 현대 포워드는 20일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할 예정이다.

현대 포워드의 선적 예약률은 96%로 20피트 컨테이너 기준으로 3700개가 실렸다. 삼성전자, LG전자의 화물이 전체 물량의 60%를 차지했다. 금호타이어, 현대글로비스, CJ대한통운, 범한판토스, 고려제강의 화물들도 실린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대체 선박인 ‘현대 플래티넘’은 오는 15일 부산을 출발해 광양을 거쳐 26일쯤 LA에 도착한다. 현대 플래티넘의 선적 예약률은 60% 수준이다.

현대상선은 예약률이 당초 예상보다 낮은 점을 고려해 구주노선 등 추가 선박 투입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화주들이 한진해운 법정관리 초기에는 유례없는 상황에 당황해 긴급 노선 투입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 선사를 이용하는 등 나름대로 해결 방안을 찾은 것 같다”고 했다.

애초 세계경기 장기 불황에 따른 물동량 감소로 해운업 공급과잉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화물 선적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한진해운 사태 이후 해운 운임이 크게 올라 수출입업체의 운임 부담은 커진 상황이다.

아시아‧미 서해안노선 운임은 9월 5일 1FEU(40피트 컨테이너 1개)당 1746달러로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전이었던 8월 30일(1153달러) 대비 51% 상승했다. 아시아‧유럽 노선 운임도 같은 기간 1TEU당 695달러에서 949달러로 36% 올랐다.

정부는 한진해운 대기화물 운송 지원을 위해 대체선박 투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현재 베트남(1척), 필리핀(1척), 미주노선(4척)에 선박을 투입했다. 유럽노선(9척), 동남아노선(9척)에도 선박을 추가로 투입할 예정이다.

세계 1‧2위 선사인 머스크와 MSC도 오는 15일부터 부산항을 경유하는 신규 노선을 개설한다. 머스크는 중국 상하이, 부산, 미국 LA를 오가는 새로운 노선을 만들고, 4000TEU급 선박 6척을 투입한다. MSC도 중국, 부산, 캐나다를 운항하는 노선에 5000TEU급 선박 5척을 운영하기로 했다. 중국 해운업체 COSCO(세계 4위)와 대만 해운업체 양밍(세계 9위)도 부산을 기항하는 노선에 선박을 늘렸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머스크와 MSC의 선박이 추가로 투입되는 9월 15일이 지나면 국내 대기화물 운송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지난 1일 부산항 신항 한진해운부두 야적장에 한진해운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 줄소송 이어질 듯…국내 해운업 경쟁력 확보도 중요 과제

해운업계는 물류대란에 이어 소송대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한진해운에 3600TEU급 컨테이너선 2척을 빌려 준 영국 선사 조디악은 법정관리 시작과 동시에 용선료 청구 소송을 냈다. AP묄러-머스크그룹 계열사 APM터미널은 지난 3일(현지시각) 미국 LA에서 항만 사용료 등을 지불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물류대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 화주들과의 소송도 문제다. 한진해운에 화물을 맡긴 화주들은 8300곳으로 추산된다. 화주들이 한진해운에 맡긴 화물 가액은 140억달러(16조원)규모다. 일부 미국 업체들은 피해 보상을 위해 집단 소송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물류대란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우리나라 해운산업 경쟁력을 확보할 방안을 찾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국내 대기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외국 선사들이 나서면서 한진해운의 미주노선 점유율을 머스크 등 외국 선사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준수 서강대 경영학 석좌교수는 “당장 해운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류대란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만, 이로 인해 손상된 경쟁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한진해운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우수 인력과 해외 영업 네트워크를 서둘러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