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평소 친분이 남다른 오너 사이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국내 대표 휴대폰 회사인 삼성전자와 무선통신 1위 SK텔레콤을 각각 이끌며, 오랜 사업 파트너이자 돈독한 재계 선·후배 지간이다.
이 부회장은 2013년 4월 최 회장의 후임으로 보아오포럼 이사에 선임됐다. 보아오포럼은 아시아의 다보스포럼으로 불린다. 최태원 회장은 6년간 이 포럼의 이사회 일원으로 활동하다, 2013년 4월 이 부회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이재용 부회장은 당시 기자들에게 "최 회장님이 (포럼 활동에 대해) 특별히 부탁하신 만큼 3년 동안 열심히 활동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한 남자의 등장으로 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이 부회장과 최 회장 사이에 끼어든 남자는 바로 궈타이밍(郭台銘) 훙하이 회장. 그는 아이폰 하청업체로 알려진 폭스콘의 모회사 훙하이를 이끄는 대만 재계의 거물이다. '타도 삼성'을 외치는 반(反)삼성파이기도 하다.
궈 회장은 2012년 6월 주주총회 후 기자회견에서 "샤프와의 공조로 고화질·고선명 디스플레이를 만들어 삼성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급기야 올해 4월 삼성전자를 제치고 샤프를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흥미로운 것은 궈 회장이 삼성과는 적대적 관계지만, 삼성의 사업파트너인 SK와는 피를 나눈 사이라는 점. 2014년 당시 SK C&C(현 SK주식회사 C&C)에 3810억원을 투자, 현재 SK주식회사의 4대 주주다. SK주식회사 C&C와 훙하이는 지난해 5월 IT서비스 합작사도 세워 밀월 관계를 확대했다.
◆ 루나폰 성공, SKT와 폭스콘 합작품
SK텔레콤은 지난해 9월 TG앤컴퍼니와 기획한 40만원대 스마트폰 '루나(LUNA)'를 국내 통신시장에 선보였다. 인기 걸그룹 AOA의 멤버 설현을 모델로 내세운 중가폰 루나폰은 프리미엄 스마트폰과 맞먹는 성능에 아이폰 같은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출시 열흘 만에 1차 생산 물량 3만대가 동이 났다.
루나폰의 기획과 판매는 한국 회사가 맡았지만, 제조는 대만 폭스콘이 담당했다. 아이폰 기획·설계는 직접 하지만 제조는 폭스콘에 위탁하는 애플과 유사한 전략을 취한 것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외산폰이 자신의 브랜드로 국내 통신 시장에 진출할 경우, 삼성·LG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면서 "제조경쟁력을 가진 폭스콘이 SKT와 연대해 탄생한 루나폰은 새로운 사업 모델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SK와 훙하이의 협력관계는 스마트 팩토리, 합작사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SK주식회사 C&C는 폭스콘 중국 충칭 프린터 공장에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 중이다. 생산 공정을 실시간으로 분석·진단하고 설비 고장이나 사고를 예방하는 지능형 공장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다. SK는 폭스콘 공장의 성공사례를 발판으로 해외 스마트 팩토리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폭스콘과 SK주식회사 C&C는 지난해 5월 720억원을 투자, 홍콩에 합작법인 FSK홀딩스도 설립했다. FSK홀딩스는 스마트 팩토리 솔루션의 핵심인 사물인터넷(IoT) 모듈을 생산하는 다이와 어소시에이트 홀딩스를 지난해 말 인수했다.
◆ 삼성, 샤프 인수 매력도 높았지만 폭스콘이 가져가
올해 초 아시아 전자업계의 시선은 일본 전자회사인 샤프에 쏠렸다. 샤프의 새 주인이 누가 되느냐는 한국·일본·대만 3국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올해 2월 재무구조 개선을 추진 중인 샤프의 인수자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변수라는 기사를 냈다. 니혼게이자이는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말 일본의 대형 금융사 대표를 만나 "샤프를 지원하고 싶은데 일본 정부가 우리의 진심을 오해하고 있다. 진의를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삼성 입장에서 샤프의 일본 간사이 지역 사카이 공장은 인수 매력도가 높았다. 사카이 공장은 60인치 이상 대형 LCD(액정표시장치) 패널을 생산하고 있고, 삼성전자는 이 곳의 패널을 조달해 TV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삼성전자가 사카이 공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10세대 LCD 공장을 짓기 위해 수조원을 별도로 투자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사카이 공장은 2012년부터 샤프와 폭스콘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삼성전자와 샤프는 국적은 다르지만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2년 말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직후 일본 오사카로 날아가 샤프 경영진을 만났고, 2013년 5월에는 샤프 전·현직 경영진이 한국을 찾아 삼성전자 경영진과 만났다. 이 사이 삼성전자는 샤프에 104억엔(약 1200억원)을 출자, 샤프의 지분 3%를 사들인다는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그 당시 자본제휴 목적은 10세대 LCD 패널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샤프를 놓고 막판 역전 드라마는 펼쳐지지 않았다. 샤프는 올해 4월 예상대로 궈타이밍 회장이 이끄는 훙하이의 품에 들어갔다. 궈 회장은 올해 6월 훙하이 주주총회 직후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를) 2018년 이전에 고객사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전쟁을 예고했다.
◆ 삼성-SK, 반도체 시장에선 양보 없어
SK가 2011년 말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를 인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삼성과는 사업적으로 부딪치는 영역이 없었다. 에너지·통신이 주력인 SK는 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TV 등이 주력인 삼성과 전통적인 우군이었다. SK 임원들은 사석에서 "삼성전자가 세계 휴대폰 1위가 될 수 있었던 데는 SK텔레콤과 같은 통신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도 삼성전자의 단말기를 가장 많이 사주는 회사가 바로 SK"라고 말한다.
SK의 식구가 된 SK하이닉스는 2012년 3월 세계 2위 메모리 반도체 회사를 넘어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로 도약한다는 야심찬 비전을 제시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인 삼성전자와 피할 수 없는 선의의 경쟁을 예고했다. 과거처럼 두 회사가 도를 넘는 신경전을 벌이지는 않지만, 직원들간의 경쟁의식은 상당하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라며 "SK는 훙하이와 연대해 중화권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고, 반도체 시장에서는 전통적 우군인 삼성과 치열하게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