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이 법정관리(회생절차)를 신청한 여파로 해외 각지에서 ‘물류 대란’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와 한진그룹은 예상했던 것보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며 ‘네 탓 공방’을 벌이는 분위기다.

법정관리 신청 전부터 계속됐던 양측의 입씨름은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양측은 물류 대란 대책과 관련해서도 이견을 드러낸다. 정부는 대한항공이 담보를 제공한다면 화물 하역을 위한 자금 대출을 내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반면 한진그룹은 대한항공(003490)또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당장 지원할 수 있는 자금이 있었다면 애초에 법정관리를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컨테이너 운송 트럭이 한진해운 컨테이너를 옮기고 있다.

◆ 꼼짝도 못하는 한진해운 선박, 하루만에 15척 늘어…연체비 지불해야 풀려날듯

4일 정부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에서 압류, 입·출항 거부, 하역 중단 등으로 운항이 정지된 한진해운 선박은 68척(컨테이너선 61척·벌크선 7척)에 이른다. 전날인 지난 3일 운항 정지된 선박 수는 53척이었는데, 하루만에 15척이 늘었다. 항구에 들어오는 즉시 압류되는 분위기다. 한진해운 보유 선박은 미국, 중국, 유럽 등 전 세계 23개국 44개 항만에서 운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

묶여 있는 화물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이제 출항하려고 하는 화물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전세계 곳곳의 한진해운 선박이 발이 묶이면서 글로벌 경쟁사들이 운임을 올리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상공회의소에 따르면, 부산 지역의 수출기업 A사는 한진해운 이용료보다 20% 비싼 가격에 외국 선사에 일을 맡겨야 했다. 해운 전문지 로이드리스트는 중국 선사 CSOCO가 이달 15일자로 운임 인상에 나설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는 산업은행 등 채권단 관리 하에 있는 현대상선선박을 한진해운 노선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이는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오는 8일쯤부터 현대상선 선박이 각 항만에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물류 대란이 해소되려면 일단 한진해운이 연체한 항만 이용료 등부터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각국에 스테이오더(압류금지명령·stay order)를 신청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돈을 내야 압류와 운항 금지를 풀 수 있다”면서 “그들로서도 못받은 돈을 받을 방법이 인질극 뿐이라 묶어놓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한진해운, 너무 오랜 기간 항만이용료 등 연체"

관건은 누가 돈을 대느냐는 점이다. 정부도, 한진해운측도 절대 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부산신항 한진해운 부두 전경.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문제는 한진해운이 너무 오랜 기간 항만 이용료 등을 연체해 왔다는 것”이라며 “정황상 한진해운은 현대상선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부터 자금난에 빠져 있었지만, 현대상선이 먼저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한진해운은 '3분기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말해왔는데, 버텨왔던 게 아니라 그냥 자금을 연체해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채권단에 따르면 한진해운은 오는 6월말까지 용선료, 항만 이용료 등 연체금액이 3000억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난 8월말 기준으로는 연체액이 6500억원까지 늘었다. 기본적으로 연체료에 이자가 붙어 빚이 불어났지만, 뒤늦게 채권단에 적발된 연체금도 있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물류 대란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면서도 “일단 회사측과 대주주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예상보다 사태가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지만 어찌됐든 이런 사태가 일어날줄 알고 있었다”면서 “한진해운이 이런 사태를 방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 돈 없다는 한진…정부의 선택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난 달 31일 임직원에 보내는 사내 게시글에서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룹 차원에서 회사(한진해운)와 해운산업 재활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연체료를 갚으라고 요구한데 대해서는 “돈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한진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2분기(4~6월) 기준 부채비율이 1082%에 달한다. 게다가 대한항공은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3700억원가량의 한진해운 지분이 고스란히 손실로 잡힐 전망이다. 지원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진해운이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자금도 거의 없다. 한진해운은 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이미 아시아 항로 운영권, 부산 신항만, 베트남 터미널 등 알짜 자산을 (주)한진에 매각했다.

한편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금융위원회 등은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후 범 정부 비생대책반을 구성했다. 하지만 물류 대란을 잠재우는 것은 역부족인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한 고위 관계자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인지했던 곳들이 많았다”면서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서 어디까지 도울 수 있을지 정확히 알기 어려운 게 솔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