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총생산(GDP)이 지금의 5분의1 수준인 2400억달러(163조원)에 그쳤던 1989년. 한국에서는 컴퓨터의 대중화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 해 초 전국에 보급됐던 개인용 컴퓨터(PC)는 약 50만대. 16비트AT급 컴퓨터 한 대가 그 당시 돈으로 최고 450만원을 호가했다. 가정집에서 컴퓨터를 구매해 사용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택시를 몰던 김재현(당시 11세)의 아버지는 신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삼성전자에서 만든 8비트 컴퓨터 ‘SPC-1500’을 사다가 어린 아들을 옆에 앉혀놓고 게임을 제작하곤 했다. 컴퓨터를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무작정 코딩(프로그래밍) 서적을 사서 수천줄의 코드를 컴퓨터에 그대로 입력했다. 아버지 옆에 앉아 몇날 며칠 코딩 과정을 지켜보던 김재현은 자연스레 틈날 때마다 컴퓨터를 끼고 지냈다.

김재현 N42 대표이사.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그는 스스로를 “천생 IT 개발자”라고 표현한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나는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IT 강국으로 성장했다. 전세계 종합 반도체 시장 점유율 2위 기업(삼성전자)을 배출했으며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컴퓨터와 함께 성장한 소년 김재현은 IT 업체(씽크리얼즈)를 창업해 60억원에 매각한 뒤, 지역 내 중고물품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을 운영하는 모바일 스타트업(N42)을 설립하며 연쇄창업가가 됐다.

폭염이 한반도를 집어삼킬듯 맹위를 떨치던 지난 22일 오후, 경기 성남 판교에서 김재현 N42 대표이사를 만났다. 김 대표는 키가 크고 날씬한 체구를 가졌는데 햇볕에 검붉게 그을린 피부 색이 그를 더 말라보이게 했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질문 한 마디에 10분 간 장황한 답변을 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수가 적어 부연 설명을 이끌어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김 대표는 후자에 가까운 듯했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나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예고’와 함께 걱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경직된 분위기가 완화돼 감에 따라 꼿꼿이 등을 펴고 앉았던 김 대표의 자세가 살짝 풀어졌고, 단답형이 주를 이뤘던 그의 말에도 살이 붙기 시작했다.

-SPC-1500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이게 286컴퓨터보다 앞선 모델인가요.

“훨씬 전에 나온 컴퓨터에요. 카세트 테이프를 넣어서 쓰는 제품이었죠. 당시 아버지가 100만원을 주고 구입하셨어요. 그 당시로는 큰 돈이었죠.”

-그 당시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준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을텐데요.

“그렇다고 저희 집이 부유하진 않았어요.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시는 평범한 집안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교육 목적보다는 아버지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 사셨던 것 같아요(웃음). 몇날며칠 한 자리에 앉아서 수천줄의 코드를 입력해가며 게임을 만들곤 하셨거든요.”

-코드를 책에서 베껴 입력하는 것만으로 게임이 만들어졌나요.

“그게 가능하더군요. 그렇게 수천줄의 코드를 입력해도 게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입력하곤 하셨어요.”

같은 또래보다 컴퓨터를 일찍 접했기 때문일까. 김 대표는 학교에서 ‘컴퓨터 통(通)’으로 유명했다. 디스켓 복사부터 프로그램 설치까지 컴퓨터와 관련된 온갖 민원이 그에게 날아왔다.

김 대표의 컴퓨터 사랑은 대학에 가서도 계속됐다. 1998년 동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컴퓨터 동아리에서 프로그래밍과 홈페이지 제작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숭실대 전산학과 대학원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훗날 씽크리얼즈를 공동 창업하는 전태연, 김현학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세 사람이 모두 대학원 동기죠.

“네. 전 이사가 1980년생이고 김 이사가 1981년생이라서 나이는 한살씩 차이가 나요. 셋이서 워낙 잘 통해 친하게 지냈어요.”

-입사도 셋이서 같이 했나요.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네요. 저와 김 이사는 대학원 졸업 후 토필드라는 회사에서 셋톱박스 만드는 일을 했고, 전 이사는 네이버에 다녔어요. 2007년 제가 먼저 전 이사의 추천을 받아 네이버로 이직했고 이듬해엔 김 이사까지 네이버로 옮겼어요.”

-네이버에선 무슨 일을 했습니까.

“콘텐츠 검색 관리 시스템을 담당했어요. 인물 정보 같은 데이터를 가공하는 일이었죠. 네이버가 만드는 콘텐츠를 키워드에 맞게 잘 노출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늘 궁금했던 건데, 네이버 인물검색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이 뭔가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언론에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어야 (인물 검색 대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어요. 스스로 신청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 받아줘요. 인물 정보의 내용은 하루에 한번씩만 바꿀 수 있도록 돼있지만 사망할 경우 즉시 바꿀 수 있어요. 제가 인물 검색을 담당할 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사망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콘텐츠를 수정하고 검색 알고리즘을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김 대표는 네이버에 다니며 밤마다 재미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단순히 재미 삼아 만든 웹사이트였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트위터 링크를 전부 수집해 어떤 링크가 가장 많이 공유됐는지 통계낼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만들었을 땐 하루 방문자가 500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게 결국 창업의 발단이 됐네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만든 것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모습을 보자, 내 아이템으로 내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틈틈이 창업 세미나에 다니며 스타트업이 어떤 건지 하나씩 배워나갔죠.”

김재현 N42 대표이사. 당근을 닮은 회사 로고는 지역을 표시하는 핀(pin)이라고 한다.

2010년 2월, 네이버를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김 대표는 전 이사, 김 이사와 함께 모바일 앱 개발사 씽크리얼즈를 창업했다. 두 사람 외에 네이버에서 만난 김태년 이사가 창업 멤버로 합류했다.

-창업할 아이템을 미리 생각하고 퇴사한 겁니까.

“2009년 10월 애플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된 뒤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이 난립했어요. 저도 재미 삼아 온라인 의류 쇼핑몰을 한 데 모은 서비스 ‘포켓스타일’을 만들었죠. 앱 스토어에 올리자마자 랭킹 4위까지 올라가더군요. 그 때 퇴사를 결심했어요.”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요.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다행히도 아내가 반대를 안 하더군요. 자신이 안정적인 직업(중학교 교사)을 갖고 있어 그랬을 수도 있지만(웃음). 아내는 지금도 제가 뭘 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믿고 내버려둬요. 참 고맙죠.”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하다고 했는데 상당히 과감한 면이 있네요.

“잘 몰라서 과감할 수 있었던 거에요. 당시 자본금 1000만원을 갖고 법인을 설립했는데 그 돈을 꽤 오래 쓸 줄 알았거든요. 결국 두 달만에 다 쓰고 바로 5000만원을 증자했어요. 창업하고 1년이 지난 뒤엔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가 1억5000만원을 투자해줬죠. 당시 ‘배달의 민족’을 서비스하는 우아한형제들도 본엔젤스에서 저희와 같은 금액을 투자 받았어요. 그 때는 김봉진 대표와 가끔씩 맥주도 마시곤 했는데 지금은 너무 잘나가 얼굴 보기가 어렵네요(웃음).”

씽크리얼즈는 포켓스타일 외에도 소셜커머스를 한 데 모아 보여주는 ‘쿠폰모아’를 출시했다. 두 서비스 모두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포켓스타일은 하루 방문자 수가 최대 2만명을 기록했고, 쿠폰모아는 출시된지 6개월만에 매출을 내기 시작해 바로 손익분기점을 달성했다. 쿠폰모아의 월 매출액은 평균 3000만~4000만원에 달했고, 얼마 안 가 누적 다운로드 횟수 100만건을 돌파했다.

-쿠폰모아가 옐로모바일 ‘쿠차’의 원조격이군요.

“맞아요. 지금은 다들 쿠차만 알고 있지만 한때는 쿠폰모아가 더 잘 나갔어요. 2011년 네이버에서 쿠차가 20만번 검색됐고 쿠폰모아는 60만번 검색됐거든요.”

-쿠폰모아의 사업 모델은 누가 고안해냈습니까.

“2010년 5월 사단법인 앱센터에서 개최하는 창업 경진대회 ‘스타트업위켄드’에서 스탭으로 일한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당시 티켓몬스터를 갓 창업한 신현성 대표를 만났는데, 티몬과 같은 서비스를 다 모아서 한번에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국내에 소셜커머스 업체가 10개 정도 있었거든요.”

씽크리얼즈는 약 2년 간 운영됐다. 연 매출액은 15억원을 기록했다. 업력 2년 미만의 스타트업 치고는 양호한 실적이었다.

2012년 6월, 김 대표에게 엑시트(투자금 회수) 기회가 찾아왔다. 반승환 전 카카오 부사장으로부터 인수합병을 제안받은 것이다. 당시 카카오는 ‘카카오스토리’를 막 출시해 유능한 개발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인수 금액은 얼마였나요.

“현금과 카카오 지분을 포함해 약 57억원이었어요. 그 중 절반이 현금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카카오 비상장 주식이었습니다. 주식이 상장한 후 매각해 상당한 차익을 얻었죠.(구체적인 ‘금액’은 말하길 꺼렸다)”

-회사를 매각한 후에도 서비스를 그대로 운영했습니까.

“저희가 운영하던 서비스는 카카오와의 사업 연관성이 낮았어요. 그래서 서비스만 10억원에 옐로모바일에 양도했죠.”

-카카오가 단순히 개발자들의 능력만 보고 회사를 인수했다는 거네요. 그런데 사실 개발 잘하는 사람은 국내에 워낙 많잖아요. 카카오가 약 60억원에 씽크리얼즈의 개발 인력을 인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씽크리얼즈 멤버들은 매우 능동적인 사람들이었어요.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 문제 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했죠. 아마 카카오에서도 그 점을 좋게 평가한 게 아닐까요.”

김 대표와 전 이사, 김 이사 세 사람은 회사 매각 후 카카오에서 3년 간 근무했다. 김 대표는 카카오에서 맛집 정보 서비스 ‘카카오플레이스’와 카카오 게임 플랫폼을 개발했다. 퇴사 전 10개월 동안은 ‘카카오택시’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는 카카오의 직원 수 150명의 벤처 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N42의 멤버들. 윗줄 오른쪽이 김용현 공동대표다.

3년이 지나 세 친구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전 이사는 씽크리얼즈에 투자했던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에 심사역(파트너)으로 합류했으며 김 이사는 제주도에서 ‘조용히’ 살기로 했다.

김 대표는 두 친구와 달리 또다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2015년 7월 초, 카카오에서 만난 김용현과 함께 자본금 5억원으로 N42를 공동 창업했다.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공동 창업을 제안했습니까.

“처음부터 같이 창업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김 대표가 창업을 하겠다고 2월에 먼저 퇴사했는데 개발팀을 꾸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저대로 새 회사에서 기획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럴 바에야 같이 창업하자’는 얘기가 나왔죠.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모르겠네요.”

N42가 서비스하는 당근마켓은 같은 지역 내 중고물품 거래를 돕는 플랫폼이다. 같은 지역에서만 서비스되는 ‘중고나라’ 카페라고 할 수 있다.

-중고나라는 많이 이용해봤나요.

“많이 써봤죠. 제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주문한 상품 대신 벽돌이나 사전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당근마켓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좁은 지역 안에서만 거래하기 때문이죠. 다른 지역에서 나온 물건은 아예 볼 수 없게 돼있어요.”

-물건을 같은 지역 안에서만 사고 팔도록 하면 거래량이 증가하는 데 한계가 있을텐데요.

“서비스 대상 지역이 계속 늘어나 전국으로 확대되면, 전체 거래량이 전국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만큼 증가할 수 있을 거에요.”

당근마켓은 경기 분당 판교를 시작으로 용인 수지, 화성 동탄, 그리고 서울 서초·강남·송파구 등 15개 지역에 서비스되고 있다. 유모차 등 육아 물품의 경우 택배로 배송하기 어려워 직접 만나 거래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 착안, 젊은 주부들이 많이 사는 주거 지역들을 골랐다.

-첫 서비스 지역으로 판교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카카오에 다닐 때 회사 내 장터가 있었는데 가격이 저렴하고 좋은 매물이 많더군요. 그걸 보면서 판교에 있는 회사들의 사내 장터를 모두 모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서비스 이름이 당근마켓이 아니라 ‘판교장터’였어요.”

-당근마켓은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근처라는 뜻이에요. 당신과 가까운 지역에서 거래할 수 있는 서비스라는 의미를 담았죠. 회사 로고를 얼핏 보면 당근 같이 생겼는데, 자세히 보면 위치를 표시한 핀(pin)이에요.”

-투자도 받았나요.

“아직은 투자 유치보다는 서비스 테스트에 집중하고 있어요. 내년까지는 전국 모든 지역에서 서비스하는 게 목표인데, 그러려면 자금이 필요하겠죠. 연말에 약 10억원의 투자 유치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두번째 회사를 설립하며 ‘연쇄 창업가’가 된 김 대표의 경영 철학은 무엇일까. 그는 조금도 고민하는 기색 없이 ‘서로 신뢰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왜 ‘신뢰’입니까.

“카카오에는 ‘서로 신뢰하고 충돌하며 논쟁하고, 결과가 정해지면 헌신해야 한다’는 기업 문화가 있었어요. 정말 공감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첫번째 덕목인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서로 신뢰해야 충돌할 수 있으니까요. 큰 회사나 경직된 조직은 서로 논쟁하려 하지 않는 반면, 우리 같이 작은 회사들은 그게 유일한 경쟁력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