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률 증가→소비 감소→내수 침체→기업활동 위축→성장잠재력 하락' 악순환
"소비로 직결되는 가계소득 증대 정책 절실"…기본소득 검토 목소리도

1.25%라는 사상 최저 금리에도 가계 저축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5위를 기록할 전망이다.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가계가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다.
금리가 낮아지면 은행에 돈을 넣어도 이자를 얼마 받을 수 없기에 투자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경기 부양을 하기 위해 금리를 낮춘다. 하지만 금리를 낮추는데도 오히려 저축이 늘어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 경제가 '저축의 역설'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래픽=이진희 디자이너

저축의 역설이란 개인은 미래를 위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합리적 행동을 하지만, 경제 전체적으로는 이런 행동으로 유효수요가 줄어들어 내수가 침체돼 결국 불황으로 연결되는 것을 뜻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런 현상을 지적하면서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23일 OECD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8.66%로 추정된다. OECD 회원국 중 5번째로 높다. OECD 34개 회원국 중 올해 한국보다 가계저축률이 높은 나라는 스위스(20.13%), 룩셈부르크(17.48%), 스웨덴(16.45%), 독일(10.38%) 등 네 나라 뿐이다.

OECD는 올해 한국의 저축률이 스위스, 스웨덴, 룩셈부르크, 독일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2011년 3.86%, 2012년 3.90%에서 2013년 5.60%로 뛰었고 2014년 7.18%, 2015년 8.82%(추정치)로 계속 오름세다.

가계저축률은 전체 저축률 중 정부나 법인의 저축을 뺀 저축률로, 가계저축을 가처분소득으로 나눈 것이다.

◆ '저축의 역설' 왜 발생할까…불확실한 미래에 고령층 늘어난 결과

전문가들은 저금리 장기화에도 저축률이 확대 되는 이유로 경기 침체 속 고용불안, 고령화 대비 등 구조적 요인에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① 경기 침체 속 고용불안
최문박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경기가 안 좋아지면 미래 소득이 불투명해지므로 돈을 쓰기 보다는 저축을 하게 된다"며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미래 소득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져 저축률이 저금리 임에도 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도 "불확실한 경기에 경제주체들이 불안 심리를 느끼면 저축을 늘리게 된다"고 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저축은 미래의 소비"라면서 "경제주체들은 소득이 있으면 현재와 미래의 소비를 배분하는 결정을 하는데, 미래를 위한 결정이 바로 저축이다. 저축률이 높다는 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만큼 크다고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② 빠른 속도의 고령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도 저축률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평균 수명이 당초 예상보다 크게 늘면서 노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세대들이 급격히 저축률을 늘리고 있다"고 밝혔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도 "복지 수혜 대상은 급격히 늘고 있는데, 이를 부담해야 할 젊은층은 확 줄고 있다"며 "노인들 입장에서는 소비하지 않고 돈을 모을 유인이 있다"고 설명했다.

③ 전월세 가격 상승으로 저축 강제효과
전월세 가격의 상승세도 저축률을 끌어올리는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연구실장은 "전셋값 폭등은 세입자들에게 저축을 강제하는 효과가 있다"며 팍팍한 살림살이 속에서 급증하고 있는 주거비로 인해 서민들이 울며겨자식으로 저축을 늘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인과관계가 거꾸로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저금리 상황 속에 저축률이 늘어난 게 아니라, 저축률은 느는데 소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금리가 계속해서 낮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소비 절벽' 우려 커진다…김영란법·개소세 인하 종료 악재도 수북

가계가 저축은 늘리고 씀씀이는 줄이면서 '소비 절벽' 현상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19일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에 따르면 2분기 평균소비성향은 70.9%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7%포인트 하락했다. 통계청이 관련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평균소비성향은 2010년 말 77.8%에서 꾸준히 하락 추세다.

☞ 참고기사
소득은 안늘고 소비는 줄이고…평균소비성향 '70.9%' 통계집계 이래 최저<2016.8.19>

2011년 이후 평균소비성향 추이

경제가 선순환하는 구조에서는 가계가 충분한 소득 속에 여윳돈을 은행에 맡기면 기업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투자를 한다. 투자로 인해 고용은 늘고 가계의 소득이 늘어 소비와 저축이 동시에 상승한다. 하지만 기업이 지금처럼 투자를 주저하는 상황에서는 경제 전반의 소비만 줄이는 역효과를 낸다.

문제는 저소득층 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불안한 미래 속에 지갑을 닫고 있다는 데 있다. 통계청 발표를 소득분위별로 보면 2~4분위의 평균소비성향은 모두 하락했다. 소득 하위 20~40%에 해당하는 2분위의 평균소비성향은 79.7%로 3.5%포인트 낮아졌다.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3분위는 3.7%포인트 하락한 75.4%, 4분위는 1.5%포인트 떨어져 70%를 기록했다. 반면 1분위는 5.4%포인트 상승한 107.0%, 5분위는 1.7%포인트 오른 59.7%였다. 사실상 고소득층을 제외하고는 모든 계층이 소비를 줄이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소비를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인 인구구조의 변화다. 특히 전 연령층 중 가장 활발한 소비를 하는 30·40대 인구의 감소세는 너무 빠르다. 전체 인구가 오는 2030년 5216만명으로 정점을 찍고 하락하는 반면 30대는 2011년 808만9000명을 정점으로 이미 인구가 하락하고 있다. 40대 역시 2011년 853만3000명으로 꼭짓점을 찍고 인구가 줄고 있다. 지난해 40대의 평균 소비성향은 75.5%로 전체 평균(71.9%)을 크게 웃돌며 전 연령 중 가장 높았다. 30대도 73.1%로 두 번째로 높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장 소비를 제약할 악재가 적지 않다. 다음달 28일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소비는 물론 고용의 위축까지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를 사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민간소비에 분명히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수 차례 우려했다. 임진 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김영란법 시행으로 음식·숙박업 고용 부진도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승용차 개별소비세 인하 종료도 문제다. 5~6월 지난해 대비 각각 20.8%, 24.1% 급증했던 국산 승용차 내수판매량은 개소세 인하가 종료된 7월 10.5% 급감했다. 미리 앞당겨 구매한 차 소비가 많았던 만큼 하반기 차 판매 감소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과감한 재정·통화정책 필요…소비로 직결되는 가계소득 증대 정책 절실"

전문가들은 저축률을 적정 선에서 유지하면서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재정 지출과 통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유효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재정 확대 정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지금처럼 통화정책이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역효과를 내는 상황이라면 정부가 직접 수요를 창출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면서 "정부 부채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정부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재정 정책 외에는 없다"고 설명했다.

최문박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단기적으로는 당장의 경기 심리를 북돋을 정책이 필요하다"며 "추가적인 금리 인하 등 더 유연한 통화정책이 필요하고, 과감한 재정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으로 위축되고 있는 경기 심리를 막아야 한다"고 밝혔다. 최 연구원은 "중장기적으로는 고령화를 극복할 복지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과감한 통화정책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제로(0) 금리' 자체가 아니라 제로 금리를 두려워하며 통화정책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다가 실물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이 진행된 후에 그 결과로 제로금리에 도달하는 것"이라면서 "중앙은행이 경기회복을 위해 과감하고 지속적인 통화정책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시그널(신호)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득이 늘면 저축을 하기 보다는 소비를 해야 하는 계층에게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문도 많았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부자에게 10만원 소득 증가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저소득층은 10만원 소득이 늘면 정말 필요한 걸 사게 된다"며 "소득재분배 정책은 형평을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수요를 늘리는 정책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전 교수는 "부채 탕감도 같은 논리"라면서 "고소득층의 부채는 탕감해줘도 바로 이게 소비로 연결되지 않지만, 저소득층의 경우는 탕감된 만큼의 금액이 바로 생활비로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소비 여력이 없는 청년실업 세대와 고령층을 지원해야 한다"며 "이들의 불확실성을 낮춰져야 저축이 소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윤여삼 미래에셋대우증권 채권팀장은 "경기 주체의 기본인 가계 소득을 증대시키는 정책이 절실하다"며 "유럽에서 거론되는 기본소득 등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 팀장은 "금융위기 이후 시도된 양적완화 등의 정책은 양극화만 촉발시켰다"며 "기업이 실제 돈을 벌었다고 해도 낙수효과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침체된 경기 활력을 키울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제기됐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저금리 속에 수익을 거둘 곳이 마땅치 않으니 돈을 계속 쌓아두는 것"이라면서 "기업의 활발한 활동을 제약하는 제약을 일시에 대거 제거해 경제의 주체인 기업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