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로 일부 저소득층 가정이 고소득층보다 비싼 전기료를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진제가 저소득층을 위한 제도라는 점을 근거로 누진제 개편을 반대해 왔던 산업통상자원부 주장의 허점이 드러난 셈이다.
정부는 누진제를 완화할 경우, 부유층이 요금 인하 혜택을 누리는 대신 누진 구간 1단계(월평균 전력 사용량 100㎾h 이하)에 속한 저소득층이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체 기초생활수급자 가구 중 가장 싼 1단계 요금을 쓰는 가정은 10가구 중 1가구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식구가 많은 저소득층이 고소득 가구보다 전기요금을 더 내는 경우도 늘고 있다. '저소득층이 전기를 적게 쓴다'는 공식이 통하지 않게 되면서 누진제가 저소득층에게 전기를 싸게 공급한다는 당초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국민에게 '요금 폭탄'만 안기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누진제로 저소득층이 부자보다 더 비싼 요금 내기도
한국전력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기초생활수급자 중에서 누진 구간 1단계(㎾h당 60.7원)에 속한 가구의 비율은 10.0%(4만4000가구)로, 누진제로 요금 단가가 1단계의 4.6배인 4단계(㎾h당 280.6원) 적용의 비율(11.8%·5만2000가구)보다 오히려 낮았다. 또 기초생활수급자 중에서 37.3%(16만4000가구)는 3단계(㎾h당 187.9원) 요금을 내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대체로 외부 활동이 적고 집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전기 사용량이 늘어나는 경우가 흔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기관들도 '높은 전기요금=부유층'이라는 전제가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감사원은 2013년 감사보고서에서 "100㎾h 이하 사용자의 94%는 저소득층이 아닌 일반 1인 가구"라며 "100㎾h 이하 사용자의 대부분이 저소득층이 아닌 일반 1인 가구로 바뀌었는데도 1단계 요금 적용 가구의 기준을 보완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누진제가 반드시 저소득층에 유리하고 고소득층에 불리하다는 공식이 깨진 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2013년 발표한 '전력 가격 체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이 최저 생계비보다 낮은 5인 이상 가구의 전기요금 단가는 ㎾h당 165.7원으로 소득이 최저 생계비의 5배인 고소득층 4인 가구(㎾h당 158.2원)보다도 높았다. 소득이 낮더라도 식구가 많을수록 전기 소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고 11.7배인 누진율까지 더해지자 최저 생계비 이하 가구가 고소득층보다 비싸게 전기를 쓰는 '역진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에너지 효율이 좋은 신형 가전기기 사용 비중이 높은 고소득층과 달리 저소득층은 오래된 제품을 많이 쓰다 보니 같은 시간 동안 제품을 써도 전력 소비량이 더 많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전문가는 물론이고 정부 기관들도 몇 년 전부터 누진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도 주무 부처가 누진제를 손보지 않은 것은 책임 방기"라고 말했다.
◇주택용 전기는 대정전 우려와 무관
정부는 누진제 완화에 반대하는 또 다른 논리로 전기 사용량 증가에 따른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 우려를 들고 있다. 하지만 김창섭 가천대 교수는 "주택용 전기는 전체 전력 소비량의 13%에 불과해 대정전이 주택용 때문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말했다.
하루 중 전력 수요가 가장 많이 몰려 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리는 시간대는 기온이 가장 높은 오후 2~3시다. 하지만 주택용 전력 소비는 퇴근 시간대 이후인 오후 8시부터 10시 사이에 집중된다. 한국전력 경제경영연구소가 집계한 지난해 8월 '시간대별 주택용 전력소비계수'에 따르면, 오후 8시 1275에서 오후 9시 1330으로 정점을 찍는다. 전력소비계수란 새벽 0시부터 밤 12시까지 시간대별로 언제 전력 사용량이 많고 적은지를 분석하는 통계로, 기준값인 1000보다 높으면 평균보다 전력 사용량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전문가들은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논의에서 산업용·일반용 등 다른 용도의 전기를 포함해 전체 전력 시장이라는 큰 틀 안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초생활수급자
소득이 법정 최저 생계비에 못 미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다. 가구 구성원에 따라 지원액이 다르다. 2인 가구의 경우 월 소득 인정액이 80만2315원 이하면 지원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