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여름, 국내 의료계에서는 포괄수가제(전국 모든 병원에서 동일한 진료비를 내도록 하는 일종의 입원비 정찰제) 시행 여부를 둘러싸고 뜨거운 찬·반 대결이 벌어졌다. 보건복지부는 과다한 진료 행위를 막고 환자의 진료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취지에서 포괄수가제 시행을 강행한 반면, 대한의사협회는 포괄수가제가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 1000여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협회의 포괄수가제 반대 의견에 대해 상당수 국민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자, 여론 조사 결과에 따라 대응 노선을 결정하겠다며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당시 협회의 의뢰를 받고 대대적인 여론 조사에 나선 기업은 한국갤럽과 아이디인큐 두 곳이었다. 한국갤럽은 세계 최대 여론 조사 기관인 갤럽(Gallup)의 한국 지사인 반면, 아이디인큐는 국민 대다수에게 낯선 이름이었다.

갤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유명세를 얻은 이 회사는 스물 여섯살짜리 대학생 세 명이 창업한, 설립된 지 약 1년 5개월 된 스타트업이었다. 여론 조사 서비스 ‘오픈서베이’를 선보인 지는 8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김동호 한국신용데이터 대표이사. 연세대 06학번인 그는 대학 재학 중 두 개의 회사를 창업하느라 아직까지 졸업을 못한 ‘초고학번’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현재, 아이디인큐의 오픈서베이는 현대카드·한국수자원공사 등 900여개 고객사를 보유한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창업자 중 한 사람이자 올해 6월까지 대표이사를 맡았던 김동호(30)는 중소기업 신용 평가 업체인 한국신용데이터를 창업해 두번째 도전에 나섰다.

지난 10일, 서울 역삼동 디캠프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그의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성숙했다. 앞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둥근 쇠테 안경을 썼으며, 정갈한 셔츠와 정장 바지를 갖춰입은 채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었다. 일탈이나 돌발 행동이라고는 전혀 모른 채 착실하고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첫인상은 항상 배신한다’는 책 제목도 있지 않은가.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06학번인 김 대표는 졸업도 미룬 채 무려 11년째 대학생 타이틀을 달고 있다. ‘화석(化石·대학교에서 고학번을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단어)’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초(超)고학번이다.

-대학은 언제 졸업할 예정인가요.

“내년 2월에 졸업해요. 올해 1학기가 4학년 2학기였는데, 필수 전공 과목을 한두개 더 들어야 졸업할 수 있거든요. 연세대 개교 이후 학교를 가장 오래 다닌 사람으로 기록을 세우지 않을까요.”

-휴학을 그렇게 오래 할 수 있나요.

“산업기능요원(병역특례의 일종)으로 일하며 군 휴학을 했고, 복학하니 창업 휴학 제도가 생겨서 2년 간 더 쉬었어요. 운이 좋았죠.”

-사업을 하며 학업까지 병행하려니 힘들겠습니다.

“성적을 잘 받으려고 애쓰면 바쁠텐데, 그저 졸업을 하기 위해 출석만 하고 있어 별로 바쁘지 않아요(웃음).”

김 대표의 ‘여유’는 이미 두 개 회사를 설립한 연쇄 창업가이기에 가능한 듯했다. 사실 그는 창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모범생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198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현재 충남대 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아버지가 도쿄에서 박사 학위를 밟고 있었다. 그는 세살 때 서울로 왔으며, 여섯살이 되자 교수로 임용된 아버지를 따라 대전으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은 줄곧 대전에서 보낸 건가요.

“대덕연구단지 안에 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어요. 대덕연구단지는 연구원이나 교수 자녀가 많다 보니 학구열이 전반적으로 높은 동네였어요.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과학자를 꿈꿨고, 저 역시 아버지처럼 연구를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죠.”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었습니까.

“재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좋아하긴 했어요. 그래서 한국과학영재학교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갔어요. 지금은 경쟁률이 20대1에 육박하지만 그 당시엔 생긴지 얼마 안 된 학교라서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해 경쟁률이 8대1밖에 안 됐거든요. 운이 좋았죠.”

김 대표는 대학에 진학할 때도 연구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연세대 공과대학에 입학한 뒤 전기전자공학과를 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가 세부 전공을 택할 시기가 됐을 무렵, 그의 생각은 180도 변했다.

-왜 연구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린 건가요.

“고등학교때까지는 이과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았기 때문에 연구원 외의 다른 직업은 꿈꿔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더군다나 과학영재학교는 정규 교육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경영학은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다 종합대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저와 다른 세계에 사는 친구들을 만난 거에요. 인문학 토론 동아리인 ‘JSC’에 들어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 다른 친구들 하는 얘길 가만히 들었는데,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세상이 이렇게나 넓은데 왜 지금까진 한 방향만 보고 달려왔나 회의감이 들었어요. 생각해보니 저는 학술 연구에 몰두하기보다는 실생활의 문제를 풀고 싶다는 욕망을 늘 품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기전자공학과가 아닌 정보산업공학과을 택하기로 했죠.”

-문과생 입장에서는 전기전자공학, 정보산업공학 간에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순수 학문과 실용 학문의 차이에요. 실제로 어머니는 제가 전기전자공학과가 아닌 정보산업공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크게 반대하셨죠. 아버지도 평생 연구를 하셨으니 제가 뒤를 잇길 바라셨어요.”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전혀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제게 ‘공부하라’는 말씀을 딱 두 번 하셨어요. 고등학교 3학년때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너무 심하게 놀았더니 ‘놀지만 말고 토플 공부라도 하라’고 말씀하셨고, 대학교 2학년 때 3점대 학점(4.3점 만점)을 받자 공부하라는 훈계를 한번 하셨죠.”

김 대표는 정보산업공학과에서 실용 학문을 배우며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 ‘일’이 ‘창업’이 된 계기는 뜻밖에 찾아왔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새너제이 캠퍼스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당시 학교 친구들과 ‘프리허그’ 이벤트를 하고 있는 김동호 대표.

2008년, 3학년이 된 김 대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새너제이(San Jose) 캠퍼스에 교환학생으로 떠났다. 새너제이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실리콘밸리의 심장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창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김 대표는 그저 “날씨가 좋아서” 캘리포니아를 택했다고 말했다.

-새너제이에서 창업을 한 겁니까.

“창업을 정식으로 한 건 아니었고, 교외 창업 경진대회에 나갔어요. 교수님이 공모전에 나가보라며 저를 추천해줘서 현지 대학생 4명과 팀을 꾸렸죠.”

-창업 아이템은 무엇이었나요.

“개발도상국을 위한 사업 아이템이었어요. 인도나 아프리카의 경우 기온이 굉장히 높아 고온으로 변질된 음식이나 백신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회간접자본이 부족해 생기는 비극이죠. 그래서 태양열을 이용한 자연 냉각 장치를 만들어 보급한다면 더위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 거라고 믿었습니다. 300만원을 들여 시제품을 만들었고, 이름을 ‘솔라 아이스 메이커(Solar ice maker)’라고 지었어요.”

-태양열로 냉각 장치를 만든다는 게 신기하네요.

“탄산칼슘 등 화학 물질을 혼합한 뒤 열을 가하면 화학 작용을 하며 온도가 낮아져요. 화학 반응을 이용해 얼음이 서릴 수 있을 만큼 온도를 내리는 거죠.”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솔라 아이스 메이커로 결승전까지 진출해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리스트들에게 심사도 받았어요. 다른 4개 팀과 함께 결승에 올라갔는데, 우승은 못 했어요.”

-왜 미국에서 사업을 계속 하지 않았나요.

“군대 문제가 남아있었거든요. 4학년 1학기까지 미국에서 마친 뒤 귀국해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했어요.”

김 대표는 산업기능요원으로서 펀드 평가 업체 와이즈에프엔에서 금융 공학을 적용해 펀드를 설계하기도 했고, ‘곰플레이어’를 만든 그래텍에서 모바일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평소에 생각했던 ‘문제’들을 직접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과학영재학교 동기동창생 두 명(추승우, 이성호)에게 공동 창업을 제안했다. 2011년 2월, 세 친구는 2000만원의 자본금을 갖고 아이디인큐를 설립했다. 세 사람 모두 학생 신분이었기에 마이너스 통장까지 동원해야 했다.

-창업을 제안하자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흔쾌히 승낙했어요. 창업을 제안하고 일주일이 지나서 바로 회사를 설립했죠. 그 당시 성호는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상태였어요. 아마 성호 어머니가 저를 원망하셨을 거에요(웃음).”

아이디인큐는 설립 당시 세 가지 사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사명 자체가 ‘아이디어 인큐베이터(idea incubator)’, 즉 다양한 아이디어를 키워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여론 조사 서비스인 오픈서베이 외에도 음식 배달 서비스, 중고 서적 거래 사업을 동시에 준비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큰 회사에서도 세 가지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긴 힘든데⋯.

“저희의 판단 착오였죠. 회사를 설립하고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은 없었고, 자금은 바닥이 났어요. 그러던 중 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에게 엔젤(개인) 투자를 받았는데 신 대표가 ‘사업 여러개를 동시에 진행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8월부터는 여론 조사에만 집중했고 나머지 두 개 사업은 포기했어요. 4개월 뒤인 2011년 12월 오픈서베이가 나왔습니다.”

오픈서베이는 대면 설문이나 전화, PC를 주로 이용했던 다른 여론 조사 업체들과 달리 아이폰·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을 주 무기로 내세웠다. 김 대표에 따르면, 당시 오픈서베이가 여론 조사를 완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기존 업체들보다 100배나 빨랐으며 비용은 10분의 1 수준이었다.

-오픈서베이 출시 당시 업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죠. 리서치 업계는 금융업계만큼 보수적이에요. 현재 국내 10위권의 여론 조사 업체 중 아이디인큐를 제외하고 가장 젊은 업체가 1998년 설립된 마크로밀엠브레인이에요. 신생 업체가 순위권에 오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업계가 보수적이어서 영업이 어려웠는데,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공중파 방송사의 8시 뉴스가 오픈서베이를 이용해 직접 여론 조사를 해본 뒤 보도를 해준 거에요. 전국의 300여명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였는데, 기존 여론 조사 업체들은 2~3일이 걸리는 일을 4시간만에 완료했거든요. 그 일로 자연스럽게 홍보 효과를 얻게 됐어요. 서비스를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는 고객사가 100개로 늘었고 벤처캐피털에서 60억원을 투자받게 됐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군요. 혹시 회사의 성장 속도와 김 대표의 성장 속도 간 괴리는 없었나요. 아무래도 너무 어린 나이에 창업을 했으니 힘에 부치는 일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업무 외적인 문제, 즉 직원들을 상대하고 조직 관리를 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어요. 예를 들어 큰 회사에 다니다가 작은 회사로 옮겨왔다는 것이 그 직원에게 어떤 무게로 작용하는지, 혹은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어떤 문제를 겪을지 제대로 공감하고 이해하기엔 제가 너무 어렸던 거에요. 창업 초기에는 친구들끼리 모여 일하는 게 전부였으니 조직 관리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회사가 성장하면서 그런 문제가 부담이 됐어요.”

아이디인큐 시절 김동호 대표. 당시 맥킨지에서 근무하고 있던 황희영 현 아이디인큐 대표(왼쪽 뒤)가 오픈서베이 클라이언트데이에 참석했다.

조직이 성장하면서 느낀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김 대표는 지난 6월 아이디인큐의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연쇄 창업에 나섰다. 아이디인큐의 대표직은 맥킨지 출신 황희영(40) 전 부사장이 맡고 있다.

-황 전 부사장에게 대표 자리를 넘긴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창업자가 계속 CEO를 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 가장 잘 맞는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제가 CEO 역할을 가장 잘 했던 때는 0에서 1을 만든 시기였다고 생각해요. 반면 조직을 체계적으로 키우고 관리하는 건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챕터가 바뀌면 주연도 바뀌어야죠. 황 신임 대표는 맥킨지에 근무할 당시 2년 간 오픈서베이 서비스를 직접 사용한 고객이었어요. 그 때부터 오픈서베이와 아이디인큐에 대한 애정이 컸죠. 심지어 고객사들과 모이는 ‘클라이언트 데이(client day)’에서 직접 오픈서베이 사용 경험을 발표하기도 했죠. 그만큼 아이디인큐의 신임 대표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현재 아이디인큐의 고객사는 약 900개에 달한다. CJ E&M과 현대카드·한국P&G·한국3M·롯데칠성음료·BMW 등 대기업과 한국수자원공사·한국관광공사, 그리고 야놀자 같은 벤처 기업까지 다양하다. 국내 설문조사 업계에서 아이디인큐의 순위는 2~3위 수준이라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김 대표가 말한 ‘챕터2’에서는 엑시트(투자금 회수) 방안도 고민해야겠죠.

“물론 고민해야 합니다. 단, 아직은 이르고 회사가 지금보다 3~4배 성장한 뒤에 고민해보려고 해요. 개인적으로는 매각보다는 상장이 더 이상적인 엑시트 방안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주주들의 의견을 수렴해 결정해야겠죠.”

-한국신용데이터는 어떤 일을 하는 회사입니까.

“중소기업이 겪고 있는 자금 조달 문제를 풀기 위해 설립한 회사입니다. 중소기업은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기 위해 대부분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를 받아요. 그런데 정성평가는 기준이 불분명해 등급을 분명하게 나눌 수가 없어요.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죠. 그래서 중소기업은 대출을 받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시중은행도 중소기업 대출 시장에 진출하는 걸 꺼릴 수밖에 없어요. 한국신용데이터는 중소기업의 현금 흐름 등 재무 정보를 컴퓨터로 정확하게 평가해 해당 기업에는 실적 전망을 제시하고 은행에는 대출 기준을 마련해줍니다.”

-수익 모델은 무엇인가요.

“중소기업의 재무 정보를 분석해 시중은행에 판매할 계획입니다. 해당 기업에는 자료를 무료로 제공할 거에요. 우선 기업의 재무 자료를 확보하는 게 관건이기 때문에 영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브로셔를 들고 걸어다니다 눈앞에 기업이나 점포 간판이 보이면 무작정 들어가서 명함부터 들이밀어요. 하루에 최소한 10명은 만나는데 얘기도 안 들어보고 문전박대하는 분들도 있어요(웃음).”

-중소 사업자는 무료로 기업 정보를 제공 받는데 왜 문전박대하는 건가요.

“매출액 등 구체적인 실적이 공개되면 권리금이 오를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것 같아요. 사업자 본인과 은행 외에는 정보 접근 권한이 없지만, 그분들 입장에선 불안할 수 있겠죠.”

현재 한국신용데이터는 프로토타입(상품화에 앞서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핵심 기능만 넣어 제작한 기본 모델)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험 가동하고 있다. 실제 업체의 데이터 12개를 포함해 총 500개가 넘는 데이터를 프로토타입에 넣어 테스트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사’가 잇따랐다. 지난달엔 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와 조용범 페이스북코리아 대표 등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2억원을 투자 받았다. 이들은 앞서 김 대표가 아이디인큐를 설립했을 때도 초기 투자에 참여한 바 있다. 우리은행에서 운영하는 액셀러레이터(창업 투자·육성 업체) 위비핀테크랩에서는 지원 대상 1순위 기업으로 선정됐으며 오는 30일 금융위원회의 은행권 공동 API(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개설 행사에서 서비스를 시연하게 됐다.

-창업 초기부터 제도권 금융업계와 긴밀히 협력하는군요.

“자본시장에서는 제도권과의 공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제도권과 손을 잡아야만 법적 테두리 안에서 정식 사업자로 인정 받을 수 있어요. 기존 사업자에 대해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김 대표의 프로필을 검색해보면 기획재정부 경제혁신국민점검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라고 나오는데, 혹시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꿈도 있는 겁니까.

“제안이 들어온 적도 없지만, 설령 들어온다 해도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젊은 기업가로서 민간의 생각을 관에 전달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김 대표의 장래 희망은 무엇입니까. 세번째 회사를 창업할 생각도 있는 건지.

“만약 한국신용데이터도 잘 성장해 챕터2까지 가고 그 시점에서 제가 대표직을 맡는 게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또 다시 창업할 수도 있겠죠.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