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수요만 늘리고 국민 요구는 충족시키지 못하는 땜질 정책"
"전력 생산 원가부터 정확히 계산하고 가정용 누진제 완화해야"

폭염으로 '전기요금 폭탄'에 대한 국민 우려가 커지자 산업통상자원부가 주택용 전기요금을 7~9월에 한시적으로 인하한다고 밝혔지만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에너지 전문가들도 "산자부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기존 방침을 180도 뒤집고 허겁지겁 요금 인하 방안을 내놨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전력 원가부터 다시 계산한 뒤 누진제 요금체계를 전면 재검토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국 전 지역에 첫 폭염특보가 내려진 11일 오후 3시 46분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 거주민 방 온도가 39도까지 치솟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지난 11일 가정에서 요금 인하 효과를 볼 수 있도록 7~9월 동안 현재 6단계인 누진제 구간 폭을 50킬로와트시(kWh)씩 늘린다고 밝혔다. 각 구간별 사용자들은 50kWh씩 전 단계의 더 싼 전기요금을 낼 수 있다. 1단계는 150킬로와트시(kWh) 이하, 2단계는 151~250kWh, 3단계는 251~350kWh, 4단계는 351~450kWh, 5단계는 415~550kWh, 6단계는 551kWh 이상이다.

산자부는 "이번 조치로 전체의 95%인 2200만 가구가 3개월 간 평균 2만1000원 정도 요금이 인하되는 효과를 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를 들어 에어컨을 쓰지 않을 때 월 평균 350kWh씩 전력을 쓰는 A씨네 가구가 올 여름 사용전력 1.8kW짜리 스탠드형 에어컨을 하루에 8시간씩 틀었다면 전력사용량은 800kWh로 급증하고 요금은 6만2900원에서 37만8600원으로 껑충 뛴다. 이번 조치가 적용된다면 A씨네 전기요금은 34만1800원으로 3만6800원 줄어든다.

◆ "50kWh, 에어컨 하루 평균 1시간 더 틀 수 있는 정도"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방안

누진제 구간 폭을 50kWh씩 확대하기로 한 것에 대해 김용래 산자부 산업에너지정책관은 "샘플 조사를 해보니 통상 8월이 되면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한 단계 높은 구간으로 이동하는 가구가 다른 달에 비해 급증했다"면서 "100kWh씩 확대하게 되면 너무 많은 사람이 한단계 낮은 단계를 적용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절반 수준으로 구간 폭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50kWh는 1.8kW짜리 스탠드형 에어컨을 25시간 정도 틀 수 있는 전력량이다. 하루 평균 1시간 정도 더 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30대 이상 주부들이 많이 이용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산자부가 고작 1시간 에어컨을 더 틀 수 있게 해주고 생색을 낸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번 달 들어 기온이 40도 가까이 올라가면서 에어컨을 평소보다 3~4시간 더 트는 가정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홍준희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는 "작년 여름에 일부 구간에 대해서만 요금 인하를 적용했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 혜택을 보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인하 폭이 50kWh로 적어 상당수 사람들이 요금 인하를 체감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이번 조치로 사회적 약자, 저소득층에게 얼마나 혜택이 돌아갈 지 의문"이라면서 "전력 수요만 늘리고 국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땜질식 정책이 아닌가 싶다"고 평가했다.

이번 조치에 드는 비용 4200억원은 한국전력이 전액 부담하기로 했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더 많이 요금을 할인해줬다면 서민들의 부담은 크게 줄었겠지만 비용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적절한 수준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 "전력 원가부터 다시 계산하고 누진제 완화해야"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미봉책에 불과하며 현 제도의 불합리한 점이 그대로 남는 만큼, 누진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홍준희 교수는 "이번에 전기료 논란이 확대된 것은 정부가 전력 생산 원가를 정확히 계산해 발표하지 않은 영향이 컸다"면서 "정확한 분석을 한 뒤 학계, 시민단체, 산업계 등이 모여 에너지 정책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현제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기획본부장은 "가정용 누진제를 현재 6단계에서 3단계 정도로 완화하고 사용량에 따라 징벌적으로 요금이 늘어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1단계와 6단계 간 요금 차이가 11배 넘게 나는데, 이 격차를 줄이는 것이 핵심"이라면서 "1인가구가 늘어나는 점을 감안해 원가 이하의 요금을 내고 있는 1~3단계 구간에 대해서는 요금을 현실화 하고, 저소득층은 바우처 형식으로 별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문승일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지금의 가정용 전기요금 체계에는 최근 생활 여건, 기후 환경, 경제수준 향상 등이 반영돼 있지 않은데 정부가 누진제를 적용해 전력 사용을 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전체 전력 사용량에서 가정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15%도 안되는 만큼 산업용, 일반용 전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력 요금체계는 소득 재분배 보다는 경제 효율성을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종민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력 요금은 기본 세율을 평평하게 만들고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추가로 내는 방식이 효율적이다"라면서 "지금처럼 정부가 전력 가격을 통제하면, 에너지 신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