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인(회계사나 회계법인)과 감사를 받는 기업 사이의 ‘독립성’이 훼손된 사례가 최근 들어 연이어 터지고 있다. 독립성이란 감사를 받는 기업과 담당 감사인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감사인이 신뢰할만한 감사보고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초 감사회사 주식을 불법으로 거래한 회계사들이 대거 적발되면서 국내 회계업계에 대한 신뢰는 또 한번 무너졌다. 올해 초 증권선물위원회는 ‘회계법인 빅4’로 불리는 삼일PwC·삼정KPMG·딜로이트안진·EY한영을 포함한 회계법인 12곳의 회계사 22명을 징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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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병우 청와대 정무수석은 가족회사 감리를 육촌 친인척이 부회장으로 있는 회계법인에 맡겨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우 수석의 가족회사를 감리한 회계법인은 이 회사가 소유한 빌딩에 세들어 있기까지 했다. 한국공인회계사회가 초고속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문제를 삼을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 독립성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동의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회계 전문가들은 “감사를 받는 기업과 담당 감사인 사이에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이 바로 독립성인데, 이 점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올 들어 각종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다”며 “외국에선 잘 지켜지고 있는 독립성이 우리나라에선 왜 지켜지지 않는지 다방면으로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단 전문가들은 회계사와 기업간의 독립성이 이토록 훼손되는 배경에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진단했다.

◆ 원인 ① “외관만 독립성 유지해선 소용 없어…정서적 독립성 중요”

“미국에서 말하는 독립성이란 ‘완전한 윤리’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따지는 것처럼 외부적인 요인 몇 가지만 피하면 되는 게 아니죠.”(노준화 충남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회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회계업계에서 독립성 유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편협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감사인 독립성이 잘 지켜지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선 몇몇 외관상 요건만 충족하면 독립성이 잘 유지됐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공인회계사법과 공인회계사 윤리강령에 회계사와 기업간의 독립성 유지에 대한 기준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일단 회계사는 감사를 맡은 회사의 주식을 매매하면 안되고, 감사와 외부 컨설팅이 동시에 진행되면 안 된다. 친인척에게 감사를 맡기는 것도 독립성을 위반하는 행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외관상 요건(외관상 독립성)이 침해되지만 않으면 회계사와 기업간의 독립성이 잘 지켜졌다고 판단한다. 기계적 판단을 내리는 셈이다.

하지만 엔론 사태 등으로 회계체계를 정비한 미국에서는 독립성에 대한 범위 자체가 다르게 인식된다. 우리나라보다 복잡하다. 외관상 독립성 뿐 아니라 정서적 독립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노준화 교수는 “회계사와 담당 기업의 누군가가 막역한 친구 사이일 때, 심지어는 아주 친한 옆집 이웃이라고 해도 독립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친인척 관계가 아닐지라도 감사보고서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관계라면 독립성 위반 사례로 본다는 뜻이다.

물론 미국도 정서적 독립성을 제도나 윤리강령에 명시하진 않고 있다. 다만 만약 감사인이 정서적 독립성을 위반할 경우 소송을 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호세 로드리게스 삼정KPMG 감사지원센터 글로벌 리더는 “회계인과 기업이 독립성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투자자가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잘못 투자했다는 소송이 들어오면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며 “이 때문에 한국에 있다는 ‘관피아(관료+마피아)’가 미국엔 없거나 적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립성을 위반하는 경우 감사인의 명성이 추락하고 업계에서 존속이 어렵다는 점도 미국에서 독립성이 잘 유지되는 요인이다. 미국은 감사인이 내놓는 감사보고서의 품질에 따라 감사비가 책정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보고서를 내놓으면 제대로 된 감사비를 받을 수 없는 데다 시장에서 바로 도태되는 구조다. 정도진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회계법인도 등급을 표시하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원인 ② “10점짜리 회계사 윤리교육…이래선 인식 안 바뀐다”

국내 회계사를 배출하는 시스템에 윤리 교육이 지나치게 경시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내년부터 공인회계사회(CPA) 시험에 윤리 과목이 일부 출제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그 중요도가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내년부터 시행되는 공인회계사 시험에서는 ‘직업윤리’ 과목이 추가될 계획이다. 하지만 배점 할당을 보면 그 중요도는 크지 않다. 100점 만점에 10점에 그친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인 김한영(31)씨는 “직업윤리 비중이 크지 않고 내용도 방대하기 때문에 합격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회계 부분에 더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회계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두 번의 윤리시험을 거쳐야 한다. 미국에서 회계사 활동을 하려면 주(州)회계사회와 미국 회계사협회의 윤리시험을 각각 통과해야 한다. 모두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을 맞아야 한다. 난이도도 어려운 편이다.

회계 전문가들은 올해 초 회계사들의 주식 보유 문제가 생겼을 때 일부 신참급 회계사들 사이에서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 터져나온 것은 회계사의 윤리에 대한 중요도를 너무 낮게 취급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노준화 충남대 교수는 “회계사 시험에 윤리시험이 도입되고 연간 회계사 교육시간에 윤리 부분이 포함됐지만 아직도 회계사 윤리 의식에 대한 중요성이 덜 강조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원인 ③ “독립성 감리 여력 딸리는 금융감독원·한국공인회계사회”

회계법인과 상장사에 대한 감사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감리하는 시스템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점도 문제다. 현재 외부감사 대상 비상장사 2만4000여곳과 소속 회계사 30인 미만의 소규모 회계법인은 한국공인회계사회가, 상장사 2000여곳과 30인 이상 중·대형 회계법인은 금융당국이 감리를 맡고 있다.

하지만 이를 담당하는 인원은 턱없이 모자라다. 한국공인회계사회에서 이를 담당하는 인원은 40여명에 불과하다. 그렇다 보니 한 해에 700여곳의 비상장사만을 감리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사정도 같다. 이번에 새로 뽑는 회계사를 포함해 감안하면 70~80명이 감리 업무를 해야 한다. 위험이 높을 것으로 보이는 표본 중 일부만 겨우 감리하는 수준이다.

이에 대해 회계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 교수는 “회계관련 문제가 터지면 예산 배치를 바꾸고 인력을 충원하는 등의 구조적인 변화가 있어야 회계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며 “과거 엔론 사태 이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회계사를 대거 채용해 분식회계의 싹을 없앴다”고 말했다. 근본적인 변화 없이 ‘언발의 오줌 누기’ 식으로 대안을 만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인원이 모자라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공인회계사회가 제대로 감리에 나설 수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한국공인회계사회는 회계법인이 출자해 만들어진 기구인데, 회계사에 대한 감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번 우병우 정무수석 관련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고, 공식적으로 “아무 일 없다”는 발표만 낸 것도 같은 맥락이란 지적도 있다.

한 회계 전문가는 “이번 우병우 정무수석의 일은 다른 양상으로 얼마든지 회계사들의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는 사건이란 점에서 한국공인회계사회가 유감 표시라도 했어야 한다고 본다”며 “초고속으로 문제가 없다는 점을 발표하고 없던 일로 지나가는 것은 부적절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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