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펌인 폴헤이스팅스의 한국 대표 김종한 미국 변호사는 "미국은 우리나라에 없는 사법제도가 많고 기획 소송을 하는 로펌도 많아 한국 기업들이 미리 소송과 관련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미국 변호사는 무엇보다 문서 보관 정책(Document Retention Policy)의 도입을 주문했다. 그는 "한국 기업의 임직원들은 구어체 등 무분별하고 부주의하게 이메일이나 문서를 작성해 기업, 최고경영진, 작성자 개인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며 임직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문제 관련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2014년 소니영화사가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암살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뷰'를 제작한 뒤 해킹을 당해 수만명의 개인정보가 무단 유출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미국에서도 문서 보관 정책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대두됐다.

사내 기밀인 최고위층 이메일까지 공개돼 소니 영화사는 곤경에 빠졌다. 고위 임원들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에 대한 의견 등 사적인 대화를 나눈 내용까지 해킹됐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들은 90일이면 이메일을 자동 삭제하는 인텔사와 그렇지 않은 소니영화사를 비교하는 등 문서 관리 정책의 중요성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세계 20대 로펌으로 꼽히는 폴헤이스팅스는 세계 20개국에 사무실을 두고 있고, 보유 변호사만 1000여명이 넘는다.

미국 교포 출신인 김종한 미국 변호사는 해외에서 20년 넘게 한국 기업의 국제소송을 자문해왔다. 그는 1986년 조지타운대학교 국제정치학과를 졸업(학사)한 뒤 같은 대학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Juris Doctor)를 이수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인 그는 1988~1999년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투자자문관을 지냈다.

-미국 소송과 국내 소송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국 소송의 특징은 '증거 자료 보존 의무'다. 미국은 소송이 실제로 진행 중이지 않아도 소송 제기 가능성만으로도 증거를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소송이 없다고 관련 자료를 원칙없이 폐기했다가는 형사적으로는 사법 방해 (obstruction of justice), 민사적으로는 증거 인멸(spoliation of evidence)에 해당돼 낭패를 볼 수 있다.

미국은 증거 채택 제도인 디스커버리 (discovery) 절차가 있다. 소송 당사자는 각자가 보관하고 있던 관련 자료를 소송 상대방에게 넘겨 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자료도 빠짐없이 소송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한다."

-미국 사법부가 한국 기업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지 않는 한 안전한 것 아닌가

"아니다. 미국 소송은 미국 변호사를 선임해 진행된다. 미국 변호사는 기업을 대리하는 것 뿐 아니라 법원의 역할을 위임받아 재판 과정에서 진실된 행동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소송 중 관련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면 모두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변호사의 조언을 듣지 않고 증거를 인멸하거나 제출하지 않으면 변호사가 해당 기업을 법원에 의무적으로 고발해야 한다. 미국 변호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격증을 박탈당하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형사 처벌 될 수도 있다."

-미국 기업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일부 미국 기업은 외부 법률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문서 보관 정책'을 활용하고 있다. 문서 보관 정책을 잘 실행하고 있는 기업은 소송 시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자료가 적어 소송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상대방 기업이 넘겨받은 자료에 대해 트집 잡을 가능성도 줄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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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보관 정책이란

"서류 보존을 간소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증거인멸이라는 오해를 피하고 소송에 불리한 서류가 나올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문서 보관 정책을 도입한 미국 기업들은 소송에 관련되지 않은, 오래되고 불필요한 서류를 삭제하고 있다. 나중에 소송이 제기된다 하더라도 소송 상대방에게 제출할 서류가 별로 없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서류를 제출할 확률이 낮아진다."

-문서의 범위는

"계약서는 물론 이메일과 보고서, 회의록 등이 모두 관리 대상 문서다."

-이메일까지 회사에서 관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이메일은 미국 소송에서 정황을 보여주는 주요 증거로 쓰인다. 이메일 관리에도 힘을 써야 한다. 한국 기업의 임직원들이 지나치게 구어체를 사용하는 등 무분별하고 부주의하게 이메일이나 문서를 작성해 기업, 최고경영진, 작성자 개인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메일 작성 교육을 통해 오해의 소지가 있을 만한 표현은 가급적이면 피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 기업의 문서 보관 정책의 현주소는 어떻게 보나

"한국 기업은 불필요하거나 오래된 서류들도 전부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해당 기업에 문서 보관 정책 등 관련 규정이 없기 때문이거나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기업 문화 또는 임직원의 개인적인 습관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한국 기업의 문서 관리 관행이 미국 소송에 미치는 영향은

"이러한 영구 보존 관습이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미국에서 소송이 제기될 경우 큰 불이익을 야기할 수 있다. 소송 상대방인 미국 기업은 제한적인 수량의, 소송에 관련된 증거 자료만 제출하는 반면, 한국 기업은 자사에 불리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많은 양의 서류도 함께 소송 상대방에게 넘겨주게 되기 때문이다."

-문서가 많으면 왜 불리한가

"우선 오해를 살 만한 서류가 많다는 것은 미국 원고 측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작성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내용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그러한 내용이 엄격하게 규제가 되는 상황으로 변할 수도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외부 전문가의 법률 자문 없이 기업이 독단적으로 문서 정리 업무를 진행할 경우, 특히 기업에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증거만 선택해서 삭제하게 되면 사라진 증거들로 인해 민·형사상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니 반드시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사진=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특히 주의해야 할 분야가 있나

"담합, 영업 비밀 침해, 계약 위반 등의 민감한 주제와 관련된 이메일이나 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자신이 작성하고 있는 서류가 나중에 미국 소송 과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미국 소송이 진행될 경우 이러한 서류가 디스커버리 절차를 통해 소송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서 관리 정책의 미비로 한국 기업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문서 몇 개 때문에 최고경영자나 오너가 미국에서 기소되거나 구속될 수도 있다. 최고 경영진을 포함한 고위 임원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문서를 작성할 때 더욱 세심하게 주의해야 한다. 관련 임직원의 직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기업이 조직적으로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소송에서 패소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판매금지 뿐 아니라 징벌적 배상으로 손해 배상액이 더 커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임원 회의에서 최고경영자가 지시한 내용을 회의에 참석한 담당 임직원들이 메모한 후 사내 이메일을 통해 다른 임직원들에게 'CEO 지시 사항'의 형식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과 이메일을 작성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진의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만약 최고경영자가 '선진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다른 경쟁사들은 시장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사하고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임원이 '자사의 경쟁력이 매우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선진 경쟁사의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경쟁사의 기술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시장에서 섭외한 후 그 기술자로부터 제조 방법을 직접 입수해야 한다'라고 풀어 사내에 배포할 수 있다.

이러한 이메일이나 문서가 나중에 소송 상대방에게 전달될 경우, 소송 상대방은 '이러한 지시 사항이 한국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주도해 우리의 영업 비밀을 조직적으로 탈취하라고 지시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질 경우 기업 뿐 아니라 최고경영자도 개인적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사진=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대처 방안은

"한국 기업들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문서 작성법을 포함한 문서 교육을 실시해 한국 뿐 아니라 주요 거래 국가에서 법률상 허용되는 적정한 용어나 표현을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메일이나 문서를 작성할 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용어나 표현은 삼가도록 하고 불필요한 문서들은 미국 기업들에 의해 불리한 증거로 활용될 수 있으므로 기록으로 남기지 않도록 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

-문서 정책이 증거인멸 시도라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은 없나

"기업에 불리한 증거를 찾아서 없앰으로써 추후 발생할지도 모르는 미국 소송에서의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서 보관 정책을 활용했다가는 역풍이 불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어떠한 경우라도 불법 행위로 엄격하게 금지돼 있어, 비록 사내 변호사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하더라도 불리한 증거 인멸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판단될 경우 해당 사내 변호사들이 사법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오래되고 불필요한 문서를 정리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가능하다. 미국 소송 리스크를 감소시키고 기업의 IT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문서 보관 정책을 활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