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부 신성헌 기자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1952년 1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가지. 20대 두 의대생 게바라와 그라나도는 남미 종주에 나섭니다. 이동 수단이라곤 낡은 오토바이 '라 포데로사' 한 대뿐인 상황에서 둘은 핸들을 번갈아 잡으며 장장 8000km를 달립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 해안, 잉카 유적지, 베네수엘라에 이르는 여정에서 두 청년은 소떼에 부닥쳐 오토바이가 망가지고, 태풍에 텐트를 잃는 등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를 보고, 2011년 전국 횡단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영국 출신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온 더 무브'(On The Move·2016)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오토바이광이었던 색스는 주말마다 장대한 라이딩을 즐겼습니다. 로스앤젤레스~그랜드캐년을 내달렸던 젊은 날을 떠올리며, 그는 '지구 표면에 선을 새기는' 기이한 환각을 겪었다고 적습니다. 언젠가는 사막길에서 침낭을 펴고 잤는데, 아침에 보니 어마어마한 진균 포자 밭이었다는 일화도 소개합니다.

왠 오토바이 얘기냐고요? 휴가철 추천서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중 문득 올해 초 나온 이 책이 떠올랐습니다. 휴가엔 역시 여행이고, 가이드북보다는 여행 에세이가 좋겠다 싶었습니다. 다가오는 8월 말이면 올리버 색스의 작고 1주기이기도 하고요. 그는 암 투병 중에 '온 더 무브'를 집필했습니다.

사진 위부터 1961년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자신의 바이크 BMW R60에 앉아있는 올리버 색스, 2006년 노년의 그가 페루 마추픽추에서 일기를 쓰는 모습.

사실 라이딩 이야기는 본문 내용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반 이상은 의사였던 그의 진료 활동 얘기죠. 그럼에도 이 책을 여행서로 꼽고 싶은 이유는 색스 박사의 화려한 전력 때문입니다.

1995년 여름 그는 태평양 서북부 미크로네시아 근처 섬의 풍토병을 연구하기 위해 소형 비행기에 오릅니다. 본문에는 원주민 환자들을 만나고 열대우림을 거닐고 바닷속 산호초를 둘러보고,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사카우(Sakau)라는 식물의 표본을 수집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단행본 '색맹의 섬'에도 실린 그의 여정은 한 편의 항해기를 보는 듯 합니다.

색스는 영국 옥스퍼드 의대 재학 당시엔 괴짜였습니다. 해부학 시험에서 최하위 성적표를 받아든 그는 홧김에 낮술을 마십니다. 거나하게 취해 학교를 누비던 중, 명성 높은 해부학 작문 시험이 그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술김에 과감해진 색스는 시험지를 받아들고 내리 두 시간을 적어 내려갑니다. 시험 결과는 그 주말에 일간지 더 타임스에 실렸고, 수상자는 '꼴찌' 올리버 색스였습니다. 이밖에도 본문 곳곳에는 호기롭던 그의 여러 인생 여정이 소개됩니다.

올리버 색스 지음|이민아 옮김|알마|496쪽|2만2000원

그의 회고 다수는 포르말린 냄새가 풀풀 나는 진료 기록이지만, 한편으론 여행 에세이, 항해 일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이기도 합니다. 색스는 여든둘 평생 청년이었습니다. 치열하게 달리고, 회진하고, 기록했습니다. 14살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이 70대 후반까지 1000권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니, 휴가철 추천 도서가 의사 얘기냐'라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을 분들은 '뻔하지 않은' 여행서 정도로 예상하면 될 것 같고요. 500쪽에 달하는 분량이 부담되는 분들에겐, 목침 용도로도 좋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생깁니다. 여행을 가거나, 바이크 면허를 따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