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나라 이종기 대표로부터 전통 술 업체인 예술 정회철 대표를 추천 받고나서 처음 한 일은 포털사이트에서 정회철 세 글자를 쳐서 관련 자료를 검색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회철 세 글자와 같이 뜨는 단어는 특이하게도 ‘헌법’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전통 탁주, 약주를 만드는 정회철 대표는 사법고시를 합격한 법조인 출신이다.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로스쿨의 교수로 재직하며 순탄한 생활을 하다 돌연 술 빚는 사람으로 변신한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그가 만드는 특별한 술의 향과 맛을 보기 위해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있는 그의 양조장 ‘예술’을 찾았다. 이번 취재에는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가 동행 취재 해주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전통 누룩으로 탁주와 약주를 빚는 예술 정회철 대표

그는 서울대 법대 81학번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입생 시절부터 전공인 법학 공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회변혁 운동에 빠졌다. ‘운동권’이었던 그는 3학기 내리 2.0 이하의 학점을 받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제적당했다. 그러다 11년이 지난 1994년 정부의 특례재입학 조치로 2학년 2학기에 복학했다. 이미 그는 서른 셋이었고 노동운동 전력에 구속(나중에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남)까지 경험한 이후였다.

“97년에 사시에 합격했어요. 시험을 볼 때까지도 법조인이 돼서 특별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이 그저 주변 동료들이 사시 준비를 많이 하길래 함께 어울리려고 공부했을 뿐이예요. 그런데 노동운동 전력 때문인지 판사임용이 좌절됐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변호사 일은 제 일이 아닌 것 같아 서울대 고시원 등에서 고시생 대상 강사 노릇을 오래 했습니다.”

그동안 그가 고시생을 위해 저술한 헌법 책만 10권에 이른다. ‘잘 나가는’ 사시 강사인 그를 찾아온 또 다른 시련은 ‘병마’였다. 5분 이상 책을 볼 수가 없었고,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구체적인 병명은 찾지 못했지만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게 틀림 없었다. “사시 1차시험을 앞두고는 40일간 매일 4시간 강의를 했어요. 또 밤에는 개정판 책을 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몸에 탈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전통주조 예술의 누룩제조실에서 정회철 대표(사진 왼쪽)와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가 우리 누룩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정 대표는 충남대 법학대학원 교수로 자리를 옮겼으나 그 자리도 1년 6개월만에 그만두고 지금의 술 주조 사업을 시작한 것이 2012년이다. 약 1만6500 제곱미터(5000평) 부지에 조성된 그의 양조장에서 탁주 ‘만강에 비친 달' , ‘홍천강 탁주' 그리고 약주 ‘동몽’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으며 최근엔 약주를 증류한 전통식 소주인 ‘무작 53’을 새로 출시했다. 탁주 가격은 1만원대, 약주는 3만원, 증류식 소주는 20만원으로 꽤 높은 편이다.

그의 양조장이 다른 전통 술 업체와 확연히 차이 나는 점은 누룩 제조실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동행한 이종기 대표가 말했다. “전통 술 맛의 차이는 누룩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업체들이 외부에서 누룩을 사다가 술을 빚기 때문에 맛과 향에 차이가 없어요. 같은 누룩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회철 대표는 직접 자연발효 누룩을 만들어 탁주와 약주, 소주를 만들어 맛에서 다른 업체 제품과는 확실한 차별성이 있습니다.”

전통주조 예술의 탁주, 약주 제품들.

그래서 그가 만드는 술은 느리다. 최소 5개월은 기다려야 그가 만드는 술을 맛볼 수 있다. 누룩 만드는데 최소 2개월, 그리고 탁주, 약주 만드는데 또 3개월이 걸린다. 그의 술이 다소 비싼 까닭이기도 하다. 정회철 대표는 “이종기 대표께서 사업 초창기에 저희 양조장을 찾아오셔서 ‘전통 술을 만들려면 누룩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자연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야 전통 술이라 할 수 있다'고 권하셔서 누룩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이 우리 전통 술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셈이다.

몇년 전 지금은 작고하신 배상면 회장(국순당 창업)도 비슷한 말씀을 했다. “내가 오랫동안 전통 술을 만들어왔지만 정작 우리 누룩으로 술을 만들지 못했다. 우리 누룩으로 만들지 않은 술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라고 내세울 수 없다.”

좋은 누룩을 쓴 까닭일까? 그가 만든 약주, 탁주 숙성실에서는 과일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사과, 파인애플 향도 나는 것 같았다. 정 대표는 “좋은 쌀에서 나는 과일 향"이라며 “누룩을 제대로 쓰지 않는 다른 업체들은 이 같은 향을 낼 수 없으니까 바나나 같은 과일 향을 첨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룩 만드는 과정은 한마디로 번거롭다. 도정이 되지 않은 통밀을 분쇄해 물과 잘 섞어 반죽해 반지 모양으로 성형을 하고서 누룩을 본격적으로 띄운다. 이를 대개 배양 과정이라고 한다. 그다음 건조, 숙성의 과정을 거친다.

정회철 대표가 최근 출시한 증류식 소주 무작53

다음은 약주 빚는 과정. 고두밥을 지어다가 말린 뒤 누룩이 포함된 밑술과 잘 섞는다. 이 과정이 어렵다. 위생 장화를 신고 발로 치대야 한다. 잘 치대지 못하면 술에 신맛이 강하게 나 상품성이 떨어진다. 신 맛이 강한 막걸리를 마셔본 경험이 있는가? 만든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신맛이 강하게 느껴진다면 치대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정 대표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고두밥과 밑술을 잘 섞는 것을 치댄다고 말하는데, 이 과정은 누룩이 쌀이 가진 전분을 처음에 당분으로 만들고 , 다시 당분을 알코올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만큼 누룩은 술을 만드는 가장 근본적 재료라고 할 수 있죠.”

발효 과정을 거친 약주는 숙성을 거쳐 약 90일 만에 병에 담아 상품화한다. 이종기 대표는 “자연에서 배양하는 누룩은 전세계적으로도 사용하는 사례가 없울 정도로 한국 술만의 특징”이라며 “와인, 맥주, 위스키 등 대부분의 술은 인공 효모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최근 정 대표가 야심작으로 만든 증류식 소주 무작을 살짝 맛봤다. 무작은 증류 후 2년 이상 숙성시킨 뒤 병에 담는다. 지금껏 직접 만든 누룩으로 만든 증류식 소주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작의 등장은 전통 술 복원 차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우선 마시기 전부터 은은한 향이 코를 자극한다. 첨가제를 일체 넣지 않고 누룩과 쌀 만으로 맛과 향을 만들어냈다. 향이 중국 백주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그 여운은 결코 짧지 않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모금 입 안에 넣었다. 53도의 높은 알코올 도수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목 안으로 밀려온다. 정 대표는 “은은한 향을 제대로 즐기려면 얼음을 타지 말고 상온에 둔 술을 조금씩 마시는 게 좋다"고 말했다.

무작은 강원도산 쌀만 사용한다. 물, 누룩 역시 강원도 고품질의 자원을 이용, 무작은 앞으로 강원 농산물 소비촉진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영낙없이 강원도 주민이 돼버린 정 대표의 ‘강원도 술’ 예찬론. “강원도 하면 생각 나는 것이 청정지역 아닙니까. 무작은 강원도에서 직접 띄운 누룩으로 술을 빚어 증류한 것으로, 강원도의 맛과 향을 대변합니다.” 정 대표가 대표로 있는 양조장 예술은 양조 체험, 누룩 만들기, 술 시음장 뿐 아니라 숙박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최근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