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할 당시 자잘한 프로젝트를 지목하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미래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5년, 또는 10년이 걸리는 빅 프로젝트 하나만 제대로 해도 산업화, 인력 양성, 차세대 기술 확보가 따라오게 됩니다. 따로따로 해서는 아무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정부는 10년 뒤 세계에서 활용될 수 있는 미래 기술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가 서울 명륜동 퇴계학연구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용 컴퓨터(PC)를 처음으로 상용화한 기업은 삼보컴퓨터다. 또 최초로 데이터통신을 서비스한 기업은 데이콤이며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처음으로 시작한 기업은 두루넷이다. 한국의 정보화 초석을 다졌던 이 세 기업을 이끈 인물이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현 퇴계학 연구원 이사장)다.

이 창업자는 변화무쌍한 정보통신(IT) 분야에서 비즈니스를 일으킨 '벤처 원류(原流)'였다. 재벌 기업이 득세하는 한국 비즈니스 풍토에서 40개가 넘는 벤처 기업을 설립하거나 지분을 투자하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좌절했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도전과 열망은 창조경제 생태계와 지식산업, 4차 산업혁명이 떠오르고 있는 지금도 유의미하다.

"삼보컴퓨터와 한국전력이 지분을 투자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기업 두루넷은 1999년 국내 처음으로 미국 나스닥에 바로 상장했습니다. 주가가 가파르게 올라 한때 시가총액이 현대자동차보다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한국전력의 문어발식 경영에 제동을 걸었고 한국전력은 발전 분야 자회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통신 자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두루넷 경쟁업체를 또 하나 만든 셈입니다.

그러자 나스닥에 상장된 두루넷 주식이 하루아침에 폭락했습니다. 두루넷이 통신망을 까는 데 필요한 자금을 빌릴 때 삼보컴퓨터가 보증을 서면서 삼보컴퓨터도 휘청거려 2005년 법정관리를 신청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후진국에서 정부를 믿고 사업을 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선택이 기업의 운명을 바꿔놓았지만 정부는 그런 것을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부근 퇴계학 연구원에서 만난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 겸 전 회장(83)은 삼보컴퓨터와 두루넷에 얽힌 비화를 담담히 털어놨다. 그의 명륜동 사무실은 '정보' '벤처' '기술'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책장은 유학(儒學) 서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각종 서예 작품들이 병풍처럼 낡은 소파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기술 용어들을 쉽게 풀이해가며 절체절명의 순간들, 환희와 좌절의 순간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친근했고 힘이 있었다.

◆ 스티브 잡스와 같은 방식으로 유닉스 기반 행정전산망 구축...미래를 내다본 '한수'

-1980년대 일반인에게 컴퓨터는 매우 낯선 기기였습니다. 삼보컴퓨터 설립 과정이 궁금합니다.

삼보컴퓨터가 1981년 1월 국내 최초로 개발한 PC 'SE-8001'.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하루빨리 컴퓨터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80년 7월 삼보컴퓨터의 전신인 삼보엔지니어링(1982년 1월 삼보컴퓨터로 변경)을 설립했습니다. 서울 청계천 한구석에서 자본금 1000만원, 직원 7명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청계천에서 오디오 전문 상점을 운영하던 분이 일본 샤프가 만든 소형 컴퓨터를 본떠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보자마자 이 가게를 인수해 곧바로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회사 설립 6개월 만인 1981년 1월 국내 최초의 PC 'SE-8001'을 만들었습니다. 캐나다에 1200대 가량 수출도 했지요. 1990년에는 '트라이젬 20XT'를 내놓고 본격적으로 가정용 PC 시장을 열었고 이때부터 금성(현 LG), 현대 등 대기업이 PC 시장에 진출하면서 국산 컴퓨터 생산붐이 일었습니다. 1993년에는 '잼 패드'라는 PDA(개인휴대단말기)를 독자 개발했습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에는 '드림시스 61'을 내놓았고 2년마다 주요 부품을 바꿔주는 '체인지업PC'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1982년 데이콤 초대 사장을 맡으면서 정보화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81년 청와대는 체신부에서 전기통신사업을 떼어내 공사화(公社化)하고 데이터통신 사업을 전담할 회사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정부는 정책을 입안하고 감독하는 기관이니, 장사하는 부문을 분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데이터통신 전담회사, 즉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데이콤·Data Communication Corporation Of Korea·2010년 LG유플러스로 합병)가 만들어진 것이 1982년이었죠. 초대 사장을 맡으면서 당시 오명 차관에게 행정전산망을 통합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성능이 검증된 IBM을 배제하고 행정전산망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안전한 방법 대신 미래에 쓸 기술, 10년 뒤에 뜰 기술로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했습니다. 실제로 행정전산망의 운영체제(OS)로 공개 소프트웨어인 '유닉스'를 택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움직임을 보고 유닉스의 부상을 점쳤습니다. 유럽은 컴퓨터 하드웨어 분야에서 미국에 완전히 뒤져 있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IBM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려면 유닉스를 활용할 수밖에 없지요.

데이터베이스도 IBM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새로 나온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를 채택했습니다. 통신의 경우 전용선을 깔아서 PC통신·인터넷 접속 때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시간만 요금이 부과되는 패킷교환 방식을 택했습니다."

-실패 위험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오. 리스크는 별로 없었습니다. 유닉스 OS, 패킷 교환망 등은 당시에는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확실히 활용될 기술이었습니다. IBM을 택한 것보다 10분의 1의 비용으로 행정전산망 개발에 결국 성공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애플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의 제품 개발방식과도 비슷합니다.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만들 때 직접 만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저기 기술을 모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죠.

직원들도 열심히 했지요. 이 일을 시작할 때 직원들 보고 이혼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침대 가져다 놓고 여기서 죽을 작정하라고 말이죠. 그들은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은 아니었지만,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행정전산망 도입에 반대 여론도 거셌습니다.

"행정전산망 프로젝트는 정부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당시 내무부는 행정 전산을 자체 구축하기 위해 장기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데이콤 때문에 예산이 없어졌습니다. 내무부 공적 1호가 바로 저였습니다. IBM도 제품을 팔 수 없어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들은 제 사생활을 캐며 흠 잡을 것을 찾기도 했습니다. 행여나 행정전산망 프로젝트 때문에 삼보컴퓨터가 덕을 봤다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오히려 삼보컴퓨터에 불리하게 입찰 조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행정전산망이 개통되고 나서 어떤 효과가 있었나요.

"각 부처에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한 개로 통합했습니다. 경찰청, 국세청, 병무청에서 클릭 한번으로 각종 민원서류를 뗄 수 있는 것도 행정전산망을 통합한 결과입니다. 한국이 전자정부 세계 1위를 하는 바탕도 행정전산망 통합 프로젝트 덕분이었습니다. 이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삼성SDS, LG CNS 등 대기업 계열 시스템통합(SI)업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일종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생긴 것이지요."

◆ '두루넷'의 흥망성쇠...정부·대기업의 빛과 그늘을 보다

-2001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발표한 초고속인터넷 보급률 1위를 기록하며 정보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96년 7월 설립한 두루넷(thurunet)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에 나선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루넷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에 성공하니, 하나로통신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로통신이 뛰어들자 KT도 메가패스를 내놓으며 가세했습니다.

하나로통신과 KT는 원가도 계산하지 않고 출혈 경쟁을 했습니다. 두루넷 성공이 통신사업자들을 자극했고 결국 대한민국은 초고속 통신망을 가장 싼 값에 경쟁적으로 공급한 나라가 됐습니다."

-1996년 한국전력과 삼보컴퓨터가 주축이 돼 두루넷을 설립했습니다. 두루넷의 탄생 배경이 궁금합니다.

"한국전력은 1980년대 우리나라 전역에 전력 공급을 위해 철탑을 세우고 송전선을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진국보다 뒤늦게 설치했는데 그 때는 광통신이 가능한 '광섬유(optical fiber)'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한전은 접지선(송전선 위에 낙뢰를 방지하기 위해 땅과 연결하는 선)을 설치할 때 광섬유도 집어넣었습니다. 전국에 광통신망을 깐다면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해야 했을 텐데 한전은 전력망을 깔면서 거의 공짜로 한 셈이었지요.

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1996년 종합유선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한전은 각 가정에 들어가는 케이블망도 깔았습니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기간망에 이어 기간망과 연결되어 각 가정에 들어가는 가입자망까지 확보하게 된 셈이지요.

1994년 출범한 정보통신부는 통신 사업에 경쟁을 도입하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내놓았습니다. 법령을 개정해 제2의 기간통신망 사업자, 제2의 시내전화 사업자, 제2의 이동통신사업자가 나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삼보컴퓨터와 한국전력이 지분을 투자한 두루넷은 1996년 회선임대사업자(기간통신망 사업자)로 허가받았습니다."

-당시 한국전력이 직접 통신 사업을 벌이지 않고 100여개 기업을 모아 컨소시엄을 구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정부 부처 간 싸움은 재벌들의 싸움보다 더 치열합니다. 상공부 관할인 한국전력이 통신 사업에 나서겠다고 하니, 체신부와 KT가 크게 반대했습니다. 결국 청와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지요. 한국전력이 직접 통신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체신부가 관할하는 통신 자회사를 만들어 사업하고, 한국전력은 이 회사 지분을 10% 이상 가질 수 없도록 말입니다.

한국전력은 100여개의 기업을 모아 1% 이하씩 두루넷 지분에 참여하도록 했고, 삼보컴퓨터는 두루넷 운영 회사로 10% 지분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한국전력이 운영 회사로 삼보컴퓨터를 찾아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습니다. 당시 재벌을 제외하고 정보기술 사업을 제대로 할 회사는 삼보컴퓨터가 거의 유일했으니까요.

1998년 7월 두루넷은 한국전력이 설치한 광케이블망과 지역 케이블TV망을 이용해 최고 10Mbps까지 서비스할 수 있는 초고속인터넷을 국내 최초로 서비스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전화망을 이용한 통신보다 100배 이상 빨랐는데, 두루넷은 서비스 1년 만에 가입자 10만명, 2001년에는 가입자는 100만명을 확보했습니다."

1999년 1월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두루넷 나스닥 상장 기념식. 오른쪽부터 당시 오명 장관, 이용태 두루넷 회장, 김종필 총리 등이 참석했다.

-1999년 두루넷은 국내 최초로 나스닥에 직상장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MS)도 두루넷에 약 1000만 달러(약 지분 6%)를 투자했습니다.

"한국정보통신협회장으로 활동할 때 빌 게이츠 MS 회장이 방한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앞으로 다가올 멀티미디어 인터넷 시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MS의 투자는 두루넷이 한국 기업 최초로 나스닥에 가는 데 힘이 되었습니다."

-두루넷이 어려워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을 지양하고 기업의 전문성을 살려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습니다. LG반도체가 빅딜로 사라지는 등 재계는 시끄러웠습니다. 당시 정부는 한국전력을 두고도 통신 사업을 하는 것은 문어발과 다름없다면서 통신 사업을 못하게 했습니다. 정부는 또 한국전력이 발전 자회사를 만들어 서로 경쟁하도록 했어요. 그때 한국전력이 통신 자회사를 만들었는데 한마디로 두루넷 경쟁회사를 또 하나 만들어 버린 것이죠. 그게 바로 2000년 1월 만든 파워콤입니다.

나스닥에 상장된 두루넷 주식이 하루아침에 폭락했습니다. 두루넷이 자금을 빌릴 때 보증을 섰던 삼보컴퓨터도 2005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습니다. 파워콤은 2002년 LG데이콤에 인수됐고 2010년 1월 LG데이콤과 LG텔레콤이 합병하면서 기존 서비스는 통합법인으로 흡수됐습니다.

두루넷은 결국 2005년 하나로텔레콤에 인수됐고 하나로텔레콤이 2008년 SK텔레콤에 합병돼 SK브로드밴드의 서비스 일부가 됐습니다. 법정관리 후 삼보컴퓨터는 2008년 차남(이홍선 대표)이 다시 인수하게 됐습니다."

◆ 정부, 10년 후 세계 시장에 통할 미래 기술 준비해야

-2005년 5월 삼보컴퓨터가 경영난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인성 교육 전도사'로 변신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문제를 캐고 들어가면 결국 인성이 중요합니다. 평생 사업하며 겪은 일과 깨달음을 대학이나 기업, 각종 모임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손자 손녀 10명을 집에 불러다 놓고 컴퓨터가 아니라 도덕적 리더십처럼 순전히 인성, 인간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012년 1월 1일 이용태 삼보컴퓨터 전 회장이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손자 소녀들에게 인성교육을 하고 있다.

-앞으로 정보기술(IT)은 어떻게 진화할 것으로 보이나요.

"컴퓨팅 파워의 가격이 제로입니다. 통신 값도 제로가 될 것입니다. 명륜동 몇 번지라고 지도에 찍기만 하면 알아서 찾아가는 자동차도 나옵니다. 센서와 소프트웨어, 로직(logic)만 있으면 됩니다. 꿈만 꾸면 다 구현할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소프트웨어(SW)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15년 전과 15년 뒤'란 제목으로 신문사에 칼럼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속도로 가면 한국이 15년 뒤에는 늦어진다, 정보통신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나왔을 때 뒤따라가지 말고 앞서가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시하고 자잘한 일이 아니라 큼직한 일을 해 세계에 내놓으면 국가는 점프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해야 할 것도 거대 프로젝트입니다. 10년 후 세계에서 쓰일 미래 기술을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실 빅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아니면 하기 어렵습니다.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니까요."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1980년대는 당시 오명 차관의 역할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을 설득하고 밀어붙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강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다. 이용태가 하고 오명이 밀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용태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명도 없습니다. 아무도 (미래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지요."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가 데이콤 사장을 맡으며 시작한 행정전산망 통합 시스템 개발은 사상 초유의 선(先)개발 후(後)정산 사업이었다. 당시 오명 체신부 차관이 이용태 창업자에게 데이콤 사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이 창업자는 거절의 의미로 한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데이콤에서 행정전산을 통합하는 시스템을 개발할 테니, 일을 마치면 정부가 비용을 다 내라고 한 것이다. 오 차관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행정전산망 통합시스템 개발이 시작됐다.

이용태 창업자가 이런 조건을 내건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산을 확보한 뒤 사업을 하려면 프로젝트 하나를 수행하는 데 최소 5년이 걸린다. 보통 첫해에 사업타당성을 조사하고 그 다음해에 본 예산 보고서를 내고 나서 프로젝트에 착수하는데 예산과 집행에만 5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업부터 벌여놓고 비용을 정산하면 1년 만에 마칠 수 있다는 게 이용태 창업자의 복안이었다. 정부는 감사원과는 별도로 IT 분야의 감사를 맡을 전문기관을 출범시켜 선투자 후정산을 해결했다. 이 전문기관이 바로 1987년 설립된 한국전산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