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을 마음 깊이 존경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근무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회(군대 사조직)’ 척결, 금융 실명제 시행,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누가 했나요? 김영삼 대통령입니다. 인천공항 건설, 고속철(KTX) 도입, 월드컵 유치 등 추가로 열거할 일도 많습니다. 정보통신부 출범, 초고속인터넷망 구축, 디지털이동통신(CDMA) 도입 등 대한민국 정보화 기틀을 닦은 분도 김 대통령입니다. ”

2016년 6월 23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재단법인 한국미래연구원에서 만난 이각범 원장은 “이제 고인이 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여의도 공원을 가리키며 “여의도 광장을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것도 김영삼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이각범 한국미래연구원장이 서울 여의도에 있는 미래연구원 사무실에서 국가 정보화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한국을 찾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정부가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한 배경을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세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조금만 경쟁에서 뒤처져도 영원히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컴퓨터와 정보통신, 그리고 변화와 개혁에 우리가 큰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게이츠 회장은 "한국이 정보통신 산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시의적절하고 세계적인 추세에 부합하는 것"이라면서 “협력과 경쟁의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이 엄청난 변화를 주도할 것을 확신한다"고 답했다.

1995년 12월 김영삼(YS) 대통령은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으로 개혁 성향의 이각범 서울대 교수를 발탁한다. 이 교수는 당시 1년 예정으로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교환 교수로 가 있다가 급거 귀국했다. 그는 독일 뷜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 1986~1995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산업사회학과 정보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는 청와대 수석 재임 시절이던 1996년 3월 발표한 논문 ‘초고속통신망이 거시 사회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이론적 근거로 삼아 정통부 정보화기획실 설치, 정보화촉진기본법과 벤처산업육성지원 육성법 제정 등을 추진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이각범 원장은 국가정보화 컨트롤타워인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는 국가 정보화 사업의 큰 틀을 짜는 조직이었다. 그는 2000년 5월 재단법인 한국미래연구원(www.mirero.org)을 설립, 디지털 CEO포럼, 미래전략포럼, 퓨처 코드포럼 등을 열고 지식인네트워크 사업을 하고 있다.

◆ 美 인포메이션슈퍼하이웨이는 충격...한국 정보통신부 확대개편 등 발빠른 대응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 당시 만 47세 비교적 젊은 나이에 청와대 정책 수석에 발탁됐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1987년 통일민주당이 결성됐는데, 이른바 용팔이 사건(통일 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으로 김영삼 당시 총재는 당사도 못꾸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김 총재는 이 정권도 이제 끝이다, 곧 민주화가 된다고 역설하며 인재 구하기에 나섰습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선배 한 분이 저를 추천했지요. (이 원장은 1987년 대선 때부터 김영삼 대통령 선거 진영에 여러가지 조언을 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에는 각종 토론회에서 ‘문민정부 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당시 신문들은 그를 개혁 성향 인물로 분류했다.)

― 1992년 대선 주자였던 김영삼 대통령이 정보화 공약을 들고 나온 배경이 있나요. 김영삼 대통령은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고 ‘정보화촉진 기본법’을 만들었습니다.

“1992년 미국에 들어선 빌 클린턴 대통령, 엘 코어 부통령 행정부는 ‘인포메이션 슈퍼 하이웨이(information superhighway 초고속 정보 통신망)’ 건설을 주창합니다.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쇼크(충격)’였습니다. 당시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국제대학의 전신)가 조선일보의 지원을 받아 각국 정보화 사업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지요. 인포메이션 슈퍼하이웨이로 대변되는 세계화, 정보화에 국가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으면, 산업화에 늦어 일본의 식민지가 됐던 것처럼, 한국이 또다시 21세기 식민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사회 전반에 팽배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문민정부 출범 이듬해인 1994년 ‘초고속정보통신 추진기획단’을 설치해 초고속정보통신망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 1993년 2월 대통령이 된 김영삼 대통령은 정보통신부 설립 공약을 어떻게 현실화했습니까.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1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들른 호주 시드니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세계화 구상’을 발표합니다. 귀국 후 국무회의를 열고 세계화 구상을 구체화할 추진 기구와 추진 체계를 마련하라고 내각에 지시합니다. 이 구상의 일환으로 정보통신부도 출범하게 되지요. (1994년 12월 3일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는 것을 포함한 조직 개편안을 발표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가 정보화를 통해 이뤄진다고 보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겁니다. 또 1995년 1월 청와대 세계화추진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는데, 저는 정보화 분과에서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96년 2월 인도와 싱가포르를 국빈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은 싱가포르의 첨단 물류 시스템을 시찰하고 난 후 세계화와 정보화를 국정의 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발표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정보화확대추진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등 정보화 정책에 더욱 속도가 붙었습니다.”

― 1996년 5월 청와대에 정보화 담당 정보통신비서관이 신설됩니다. 1급 신설은 눈에 띄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저와 이석채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갈등을 했지요. 제 구상은 정책 수석 밑에 정보통신비서관을 신설하고 그 비서관이 정보화추진기획단 단장을 맡는 것이었습니다.
정보통신비서관은 신설됐지만, 청와대가 정보화 업무를 주도하는 그림에 대해 이석채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 장관은 대통령을 만나 정보화 촉진을 위해 정보통신부를 만들었는데, 해당 업무를 청와대 수석이 직접 해버리면 정보통신부는 도로 체신부가 된다고 주장했어요. 저는 정보화는 한 부처의 일이 아니라 범부처를 아우르는 국가 차원의 일이라고 봤고 대통령의 재가도 받은 상태였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아무리 자기가 총애하는 사람이라도 장관과 수석 등이 서로 싸우면 너희끼리 해결하라는 입장이었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과학기술정책자문회의에서 이 사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어요. 당시 양승택 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이 자문회의의 정보통신소위원회 소위원장이었는데, 이 소위원회에서 청와대에 정보화 관련 업무를 모두 보고하고 조율하되, 정보화 업무 자체는 정보통신부에서 하는 게 옳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이후 정보통신부에 정보화 업무를 총괄하는 정보화기획실이 만들어져요. 비록 제 구상대로 청와대가 정보화를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6년 6월 정보통신부의 직제를 개편해 정보화기획실을 신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보화 역사에 한 획이 그은 일로 평가해야 합니다.” (정보화기획실은 기존 초고속 정보통신기획단을 정보통신부의 정규조직으로 확대 개편한 것으로서, 실장 밑에 정보화 기획심의관과 정보기반심의관을 두고 기획총괄과, 정보화제도과, 정보화지원과, 초고속망기획과, 초고속망구축과, 정보보호과 등 6개 부서를 만들었다.)

경상현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뒷줄 오른쪽)이 정통부 공무원들과 함께 정통부 현판을 내건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김영삼 대통령이야말로 정보화 대통령”

― 김영삼 정부 시절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를 이동통신 표준으로 정하고 PCS(개인휴대통신) 사업자도 선정하게 됩니다.

“CDMA 세계 최초 상용화도 김영삼 정부 시절에 이뤄진 일입니다. 양승택 당시 ETRI 원장은 미국 퀄컴과의 CDMA 공동 개발부터 CDMA 단일 표준 결정에 많은 기여를 했어요. 당시 많은 사람이 비동기식인 TDMA(시분할다중접속) 방식을 주장한 상황에서 뚝심있게 해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 정부가 퀄컴 지분을 샀어야 했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기회도 있었는데…. 사실 우리나라가 CDMA 방식을 표준으로 채택하지 않았다면, 퀄컴은 망했을 겁니다. 정부가 해외 기업의 지분을 사거나 인수합병(M&A)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죠. 실패하면 감사와 수사가 따르니 공무원들은 누구도 일을 벌일 생각을 안합니다.”

― 중소기업청 신설, 중소기업기본법, 벤처 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지고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한 증권 시장 ‘코스닥’도 개설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으로 직통 전화를 걸어 IT 중심의 벤처 경연장(벤처 산업 경진 대회)에 가봐야겠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행사장에서 만난 한 여성 기업인이 “대기업들이 병역특례 요원도 싹쓸이해가니, 우수한 벤처기업에 한해서 병역 특례 요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즉각 병무청에 지시해 벤처 기업이 우선적으로 병역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했지요.”

1996년 4월 1일 CDMA 개통식에서 이수성 당시 국무총리가 CDMA 이동전화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

― 흔히들 김대중 대통령 시대에 초고속망이 깔리고 벤처 붐이 일어난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초고속인터넷가입자가 1000만명을 돌파해서 그렇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수도관(초고속인터넷망)을 깐 사람은 김영삼 대통령이었고, 수도꼭지(최종구간인 라스트 원(1)마일)를 단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었습니다. 정보화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인 것이지요.

KTX나 인천공항도 김영상 정부 때 착공해서 다음 정부 때 완공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문민 정부 4대 의혹 사건’이라고 해서 대대적인 사정 작업을 벌였지만,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지요.” (그중 하나는 이석채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PCS 사업자 선정 대가로 뒷돈을 받았다며 구속 기소당한 일이었다. 이 전 장관은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

◆ 이명박 대통령의 국가 정보화전략위는 좁은 의미의 전자정부만 고집

―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보통신부가 해체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큰 실책입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고민도 있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부처마다 정보통신부 업무를 자기 업무라고 하며 다들 싸우니, 일을 못하겠다고도 했고 아예 새로운 부처를 만들까 생각 중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보고 당신이 이런 불협화음을 없애달라고도 했지요.”

― 2009년 이명박 정부는 국가정보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를 만듭니다. 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발탁됐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정보화추진기획단을 청와대에 설치하려고 했던 것은 국가 정보화는 한 부처의 정보화가 아닌 전 국가 범위의 정보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에서 그 비전을 실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위원장인 저와 위원간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컸던 겁니다. 위원들은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의 역할을 '전자정부(국가 행정 업무의 전산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전자정부위원회의 후신이라고 봤던 거지요.

제가 주장한 어젠다(스마트워크, 스마트에듀케이션, 금융 정보화, 클라우드컴퓨팅, 빅데이터 등)는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사항이 아니라는 시각이 다수였습니다. 좁은 의미의 전자정부만 위원회 사항이라는 것이었지요.

특히 공무원들은 고려대 출신인 박정호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당시 위원회 간사,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2기 위원장)를 실세로 보고 그 분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고립무원'이었습니다. 저는 스마트워크(원격 근무)를 1차 대통령 보고사항으로 넣자고 했고 많은 위원들과 공무원들이 그것이 왜 보고 사항이 되느냐고 했습니다. 교통정보화(ITS), 지리정보화(GIS), 교육정보화 등 국가 전략으로서의 정보화를 추진했어야 합니다. ”

2011년 6월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정보화전략위 보고대회에 참석, 스마트교육 등 안건보고를 듣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명박 대통령은 아주 스마트한 분이에요. 머리가 참 좋고요. 개별 사안에 대한 이해력도 굉장히 좋습니다. 버스환승센터나 청계천 복원 등 역대 서울 시장 중에서 이명박 대통령 만큼 업적이 많은 분도 드물지요. 반면 예지력이나 비전 측면에서는 약한 편입니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이 제일 중요한 시대에 두 부처(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를 없애 작은 정부를 구현하고자 한 것은 안타까운 결정이었습니다.

정보통신부를 없앤 것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한 박재완 교수의 아이디어인데요. 제가 대통령 인수위에 3번이나 찾아가서 안된다고 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보화 기획 업무나 보안 업무를 나라 살림살이를 하는 행정안전부로 넘긴 것도 정보화의 의미를 전자정부에 국한하는 결과를 낳았지요.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참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개별 사안을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사회적으로 꼭 필요한지를 판단해서 큰 줄기를 잡는 데 뛰어났습니다. 김 대통령은 이 방향이라는 판단이 서면, ‘내가 우짜면 되겠노’라고 묻고 ‘그럼 그렇게 해라’라고 지시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 바둑 애호가이자 정보화를 연구한 사회학자로서 구글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을 누구보다도 인상깊게 보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둑은 '패'라는 돌발변수가 있고 형세를 판단해야 하며 심리전에도 능해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가 사람을 쉽게 이기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컴퓨터가 '딥러닝'이라는 기계학습법을 이용해 스스로 학습하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고도의 정보화 사회에 진입한 것입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자연의 시간’ 대로 일하고 자연이 주는 대로 수확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서 수직적 명령 체계 아래에서 집단으로 일했습니다. 정보화 시대에는 수평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협력적으로 일하며 집합 지성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기계와의 경쟁 시대’에는 기존의 지식 노동자는 절반 이상이 도태됩니다. 인공지능이 다 처리할 내용을 배우는 현재의 평준화 교육도 시대에 맞게 완전히 바꿔야 할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10월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종이 없이 진행된 ‘정보화 추진 확대 보고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1996년 10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주재하는 제1차 정보화추진확대 보고회의가 열렸다. 김 대통령은 정보화 확산 과정을 직접 챙길 정도로 정보화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이날 정보화확대보고회의는 국정 회의 사상 최초로 서류와 펜이 없는 '페이퍼리스(Paperless) 회의'였다.

당시 청와대는 사전에 참석자들에게 ‘회의장에 종이 한장이라도 갖고 입장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회의 내용 메모도 금지했다. 이수성 국무총리 등 고위 공직자들과 시·도지사, 국회 여야 지도자, 전경련 등 재계인사 등 1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회의에 서류 한장 들고 온 사람이 없었다.

'페이퍼리스' 정보화확대보고대회를 제안한 사람은 당시 이각범 정책기획 수석이었다. 김 대통령은 1996년 2월 24일부터 29일까지 인도와 싱가포르를 국빈 방문했는데, 엄청난 양의 화물 이동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싱가포르의 최첨단 물류 시스템을 보고 많이 놀랐고 정보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 수석은 “사회지도층이 디지털 문화를 솔선수범해야 한다”면서 종이없는 대통령 주재 회의를 제안했다.

이날 김 대통령도 종이에 적힌 연설문 대신 책상 위에 놓인 17인치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마우스를 클릭하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전략’에 관해 연설했다. 김 대통령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데 능숙하지 못했지만, 집무실에 컴퓨터를 두고 사전에 리허설하며 파워포인트 사용법을 속성으로 익혔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3차례 정보화추진확대보고회의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