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京畿)는 서울과 주변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충청, 강원, 경상, 전라에는 군현에 읍성(邑城)이 있지만 도성 주변의 경기도 군현에는 읍성이 없다. 한양 도성(都城)만 있다. 경기도에 보이는 성(城)은 모두 산성이다.
고양군에도 읍성이 없다. 덕양구 고양동 일대가 옛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옛 건물은 향교만 남아있다. 고양시 관광안내도에 등장하는 중남미문화원 정문 앞에 보이는 건물이 고양 향교이다. 조선 숙종 15년(1689)에 처음 건립되었고 한국 전쟁 때 불탄 것을 1984년에 재건하였다.
고양 향교에서 약 400m 정도 동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벽제관지가 나온다. 지금은 '벽제'라고 하면 벽제화장터가 떠오르지만 조선시대 고양군의 객사(客舍)가 벽제관(碧蹄館)이었다. 인조 3년(1625)에 고양군의 읍치가 고양동으로 옮겨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고 한국 전쟁 때 불타면서 지금은 터만 남았다. 객사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장소이다. 이 건물이 중국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된 것이다. 한양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임금이 왕릉에 행차할 때는 행궁(行宮)으로도 쓰였다.
지금은 터만 남았고 사진으로만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 고양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이 벽제관이었다. 벽제관 앞 길가에 오래된 나무와 비석들을 통해 이 일대가 고양 읍치(邑治)였음을 알 수 있다.
고양은 한양의 외곽이기도 하지만, 개성의 외곽이기도 하다. 고양에 고려 최영 장군의 무덤과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왕릉이 있다.
벽제관지에서 약 3.2km 떨어진 곳,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에 최영장군의 무덤이 있다. 이정표에 표시된 대로 산길을 따라가 계단을 올라가면 보인다. 1398년, 73세의 나이로 개경에서 처형되고 이곳에 묻혔다. 고려의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그가 권력 교체기에 처형되면서 무속신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왕릉은 고양시 원당동에 조성되어 있다.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고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조선 태조 3년(1394)에 삼척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덤 앞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전설이 적혀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양왕이 왕위를 빼앗기고 개성에서 도망쳐 견달산 아래에 도착했다. 밤이 깊어 작은 절을 찾아 갔는데 이 절에서도 묵기는 힘들었다. 그 절의 승려들이 몰래 공양왕에게 밥을 날라 주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밥 식, 절 사, 식사동(食寺洞)이 되었다.
공양왕과 왕비를 왕씨들이 찾아다녔는데 찾지 못했다. 왕이 귀여워하던 삽살개가 연못을 향해 짖어 살펴보니 왕과 왕비가 죽어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기초로 공양왕과 왕비인 순비(順妃)의 능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양왕이 삼척에서 죽은 것으로 나와 있기에 삼척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기에 궁촌왕릉(宮村王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곳은 공양왕릉과 그의 아들인 왕석, 왕우 등 3부자가 묻혔다고 전해지기에 무덤이 셋이다.
조선 태조 즉위 후 원주, 간성을 거쳐 3부자가 태조 3년(1394) 3월 14일에 이곳으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4월 17일에 죽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양으로 이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무덤은 현종 3년(1837)에 삼척부사가 개축한 것이다. 지금의 무덤은 1977년에 개축한 것이다. 고려 마지막 임금의 무덤을 지난 겨울에 찾아갔더니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다시 고양으로 돌아와 덕양구 대자동 산 10-2번지로 향한다. 이곳에서 연산군 시대 금표비를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금산(禁山)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도성 주변 산의 맥을 훼손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함부로 나무를 베어서도 돌을 캐서도 안되고 무덤을 만들어서도 안 되었다.
이런 곳에 세우는 표식이 금표(禁標)다. 1765년에 제작된 지도 중에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라 불리는 지도가 있다. 금표가 세워진 범위를 글과 그림으로 표시한 지도다.
금산의 범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즉위한 왕에 따라 달랐다. 연산군대의 금산의 범위는 다른 왕들의 재위 때보다 더 넓었다. 현재의 그린벨트와 유사하게 도성 주변의 맥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왕이 사냥을 하거나 유흥을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금표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금표비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 금표비가 고양에 남아 있는 것이다. 금산 제도와 금표비의 존재를 글로만 알았는데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간은 동일하지만, 장소에는 여러 의미의 층이 있다. 지금 고양시를 생각하면 일산 신도시와 호수공원이 먼저 떠오른다. 고양군의 객사인 벽제관터, 고양 향교, 최영 장군과 공양왕의 무덤, 연산군의 금표비를 다녀오니 고양시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