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초딩(초등학생의 인터넷 표현)’이 인터넷 공간에서 주류(중 하나)로 활동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진위에 관계없이 댓글을 다는 풍토 때문에 ‘댓글 부대’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정보화 과정에서 ‘정보 문명’이라는 핵심 가치를 놓쳤습니다.”

이어령 전(前) 문화부 장관(82)은 웬만한 얼리어답터보다 먼저 각종 정보통신(IT) 기기를 이용한다. 그는 ‘정보 문명’이라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한국 정보화 사회의 얄팍함에 대해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2014년 서울 서소문동 배재빌딩 한중일연구소에서 이 전 장관을 만났을 때 그는 “서재에 7대의 컴퓨터를 갖춰놓고 직접 자료를 모으고, 검색하고, 정리한다”고 했었다. 요즈음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최근 수술을 받은 후로 컴퓨터 자판을 대신해 쳐주는 조수를 고용했다.

그의 왕성한 저작 활동만큼은 변함이 없다. 이 전 장관은 지난 1월 '지의 최전선'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엔 3D 프린터, 바이러스 문명 전쟁, 무선 시프트(Shift), 생명 자본주의 등 첨단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가 평상시 강조해 온 성숙한 정보문명의 필요성이 재차 조명됐다. 이 전 장관은 지난해에만 5권의 책을 냈고 앞으로는 10권을 더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교수·비평가·에세이스트·칼럼니스트·소설가·시인·관료를 두루 거쳤다. 노태우 대통령 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1988년 서울 올림픽·2002 한일월드컵·새천년준비위원회 기획자를 맡아 각종 국가적인 문화행사를 선두에서 지휘했다.

1982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펴낸 ‘축소지향의 일본인(縮み志向の日本人· 고단샤·1982)’은 두 나라에서 동시에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문명과 정보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디지로그’ 등 시대를 풍미한 표어(slogan)를 지었다. 지식(知識)의 최전선에서 거침없이 살아온 그지만, 그도 수년 전에 딸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스마트폰에 있는 고인(故人)의 자취를 보면 더 슬픕니다. 스마트폰 가진 것이 무슨 소용인가. 살아 있으니까 스마트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자명한 사실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수단을 위해 일평생을 보냈으니, 우리가 생명이 있다고,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 ‘문화평론가’, 문서작성기에서 정보화의 앞날을 보다

-1980년대 한국의 정보화 수준은 어땠습니까.

“외국 기자들이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 한다고 하니까 웃었어요. 올림픽이 열리면 세계 기자들이 모여 실시간으로 기사를 보내야 하는데, 전화도 제대로 안 되는 한국에서 무슨 올림픽을 하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화 교환기도 못 만들었습니다.

그 보다 꽤 오래된 얘기지만 집에 전화를 설치했다고 좋아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발신은 되는데 수신은 안됐습니다. 얼마나 실망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 때 느낀 바가 있습니다. 정보화는 계단 밟듯이 단계적으로 쫓아가봤자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2~3층 가던 엘리베이터를 고쳐서는 60층 가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정보화가 가져올 변화를 가늠할 수 있었던 또다른 경험은 없었습니까.

“88 서울올림픽 식전 행사 기획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원래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옹(2002년 작고)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미리 알려져 곤욕을 치렀습니다. 역대 올림픽을 치른 나라 중에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 이름이 먼저 알려진 경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최종 주자를 다시 뽑았어요. 그게 ‘라면 먹고 뛰었다’고 알려진 임춘애 육상 선수예요.

성화 봉송 주자를 다시 임춘애로 발탁한 뒤 임춘애 본인도 모르게 한 채로 저와 조직위원장 등 몇 사람만 알고 있기로 했습니다. 기자들에게 뿌릴 보도자료를 직접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했어요. 발표 당일 새벽에 인쇄하고 영문 번역한 뒤 외신 기자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정보화는 정보를 널리 알리기도 하지만, 정보화에 노출된 사람만 공유할 수 있다는 속성을 말입니다.”

-언론사 논설위원과 문화평론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만큼 ‘문서작성기(워드프로세서)’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동료 중 컴퓨터로 글 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 우리가 서양에 왜 뒤졌을까. 헤밍웨이는 반바지 입고 타자기로 아름다운 영어 문장을 써내려가고 마크 트웨인도 19세기에 타지기를 썼는데, 한국 사람은 붓으로 쓰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야는 몰라도 글씨기와 같은 정신적인 작업은 빨리 컴퓨터화하자. 타자기는 보급되지 않았지만, 한자·한글 혼용 등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컴퓨터를 생활화하자. 이건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1년 8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자택 서재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책장 옆에 디스켓 다발과 브라운관 모니터가 보인다. 2014년에는 무려 7대의 컴퓨터를 서재에 두고 자료 정리 및 문서 작업을 했던 그는 최근 수술을 받은 뒤 컴퓨터 작업을 하는 조수를 뒀다.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한글과컴퓨터 창업자 이찬진씨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막 끝났을 무렵입니다. ‘아래아 한글’을 처음 사용하고 감탄했습니다. 개발자가 누구인지를 수소문했고 이찬진 씨한테 전화를 걸어 ‘누가 한글과컴퓨터라는 기업을 산다고 해도 절대로 팔지 마라’고 했습니다.

또 이상희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세종대왕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아니면 최만리(조선시대 한글 창제에 반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음)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아래아 한글 개발팀이 우리나라 정보화를 앞당길 능력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인연이 돼 나중에 이찬진 씨와 김희애 씨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섰습니다.”

◆ 늦었지만 오히려 앞서갈 수 있었던 한국의 정보화

-1981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일본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한국이 정보화에서 일본을 앞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공부는 참 잘했지만 달리기는 항상 꼴찌였습니다. 한번은 비오는 날 운동회가 열렸는데, 달리기 트랙이 지워졌어요. 그래서 1등으로 뛰던 친구가 트랙을 잘못 보고 엉뚱한 곳으로 계속 달렸습니다. 앞선 주자들이 다 1등을 따라가 버리니, 나중에 따라가던 제가 결국 1등을 했습니다. 그때 그 생각이 났습니다. ‘아, 오히려 늦게 갔기 때문에 제대로 코스를 갈 수 있었구나.’

당시 우리나라는 전화망이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어요. 동축 케이블을 까는 와중에 광케이블이 나와 더 좋은 거로 갈아탔습니다. 산업화는 일본보다 늦었지만, 정보화는 늦었기 때문에 오히려 앞서갈 수 있었던 겁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산업화를 마친 다른 나라들은 어떻습니까. 이미 땅속에 구리로 만든 동축케이블이 잔뜩 깔렸습니다. 이미 산업화를 이룬 나라들은 동축 케이블을 걷어내고 광케이블을 깔기가 어려웠어요. 막대한 돈도 돈이지만, 사업권을 선점한 기업 간 이해관계도 복잡하죠.

일본은 초기 초고속통신망으로 ‘근거리 ISDN’ 방식을 썼습니다. 이 방식은 빠르긴 한데 광케이블과는 달리 근거리 통신으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본 NTT(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는 동축 케이블에 선투자했기 때문에 광케이블을 새로 깔 엄두를 못냈습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1991년 초대 문화부 장관 재직 시절 ‘정부가 만약에 정보를 쥐고만 있다면 빅 브라더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꾸로 국민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빅 브라더를 오히려 감시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빨리 어린 아이들부터 컴퓨터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당시 정보화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 오명 부총리, 그리고 저였습니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과학기술처는 당시 정보화를 문화나 시대 사안으로 다루지 않고, 좁은 의미의 기술 분야로 국한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용자 중심의 정보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그런 정보화를 이루려면 미디어의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미디어 캠페인이 시작된 배경입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 시대에선 모든 나라가 똑같다. 오히려 우리가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오명 전 부총리가 동아일보 사장이 되면서 신문사끼리 담쌓고 지내지 말고 정보화 캠페인 만큼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결국 1997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문사 공동 캠페인이 전개됐습니다.”

◆ “페이스북 친구 많다고 대신 울어주진 않아”

-2006년 1월 1일부터 2월 4일까지 중앙일보에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는 제목으로 칼럼을 30회 연재했습니다. 디지로그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디지로그 첫 장에 보면 ‘설날 아침에도 우리 아이들은 연하장을 이메일로 주고받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화상채팅으로 얼굴을 맞대고 실시간 대화를 즐길지 모른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디지털 기술을 동원해도 설날 떡국 맛은 재현할 수 없습니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의 차이가 벌어지는 것을 방관하면 안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한국은 일본을 앞서 갔습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정보화 사회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꼼꼼하면 세계 1등이 되었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속도가 중요해졌습니다. 한국 사회는 엄청난 스피드로 정보화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제 ‘양면(兩面)’이 필요합니다. 꼼꼼하면서도 유연하고, 충동적이면서도 계획적인 것이 통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게 디지로그의 가치입니다. 디지로그를 가장 잘 풀어낸 사람이 바로 고(故)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글 잘 쓰고, 컴퓨터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임기응변만 하고, 욕하고, 유행하는 말 아니면 다른 말은 못 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ㅋㅋㅋ’ ‘ㅎㅎㅎ’와 같은 이모티콘이 없으면, 감정 표현을 못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디지로그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2001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초고속인터넷 보급률에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수치도 의미가 없는 것인가요.

2011년 11월 29일 오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6회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시상식에서 심사평을 하는 이어령 전 장관.

“우리나라가 초고속통신망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것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부분이 있었고 게임 비즈니스에만 유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문제는 정보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위키피디아 내 한글 문서의 빈약함, 초딩이 점령한 인터넷 공간 등이 그 결과입니다. 아이들이 초고속인터넷으로 게임을 많이 할 수 있게 된 것이 정보 문명은 아니거든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수퍼컴퓨터로 주가를 예측하는 금융공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파생상품이 나오는 수준이 돼야 합니다. 군사력 측면에서는 상공에서 차량 번호를 스마트하게 식별해 정밀 타격하는 기술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선 정보화를 비즈니스와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로 정보 문명의 힘입니다.

그러나 2008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서 정보 문명의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수퍼컴퓨터를 동원한 금융공학을 내세워도 제대로 투자하고 수익을 낼 수 없었던 겁니다.

정보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너와 나 사이, 통치자와 피지배자 사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등 벌어진 그 틈을 채우는 인터페이스 혁명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틈을 ‘생명(生命)’이 지닌 가치가 메울 수 있다고 봅니다. 물질만이 최우선시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구현하는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자본주의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자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를 정보화에 국한해 보면 어떨까요. 한국 사람들은 과연 정보화 덕분에 행복해졌을까요.

“스마트폰에 보통 연락처가 20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힘들면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있나요. 정보화 이전에는 200명과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는 없었지만 힘들면 같이 울어주는 짝꿍은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에 친구가 수천 명 된다고 자랑하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정보화 덕분에 정말 행복해졌는지 다시 반문할 때입니다.”

이어령 전 장관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앞선 정보화에 걸맞은 문화를 갖추지 못하고 생명을 경시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세월호 사건 당시 학생들은 모두 스마트폰이라는 통신 수단이 있었다. SOS(조난 신호)를 보냈을 때, 아날로그의 구조 시스템이 잘 연결돼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자장면을 디지털 기기인 휴대전화로 주문할 수 있지만, 실제 자장면을 먹으려면 철가방을 든 배달원이 배달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세월호 사건을 있게 한 하드웨어도 붕괴했다는 점이다. 이 전 장관은 항공기 안전사고를 분석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만든 ‘쉘(SHELL·조개) 모델’을 언급했다. 쉘 모델에서 S(Software)는 항공기 운항과 관련한 법규나 비행절차, 컴퓨터 프로그램을 나타내고 H(Hardware)는 항공기 운항에서 승무원이 조작하는 모든 장비류를 의미한다.

E(Environment)는 습도·온도·기압·산소농도 등을, L(Liveware)은 인격·리더쉽·의사소통·팀워크·대인관계를, 또 다른 L(Liveware)은 지식·문화·태도 등을 말한다.

이 모델로 세월호 사건을 분석해보면, 선장과 승무원의 인간관계, 즉 라이브웨어(Liveware)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선박을 개조하고 과적을 일삼는 등 하드웨어도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람보다 화물을 더 중요시했다는 게 이 전 장관의 시각이다. 게다가 물살이 센 환경(Environment)도 중요한 변수였다.

“위기의 순간을 센서로 탐지해 자동 제어하는 주변 장치도 없었습니다. 탈출 상황의 매뉴얼도 없었고 누구도 지키지 않았지요. 소프트웨어(Software)도 엉망이었던 셈입니다. 세월호는 작은 나룻배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고 한 사회였습니다. 대한민국을 축약해 놓은 사회였던 것입니다. 결국 세계 최고의 하드웨어를 가졌지만, 그에 걸맞은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은 생명을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 장관은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다시 한번 디지로그와 생명을 중시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2015년 기준 스마트폰 보급률 83%로 세계 4위인 우리나라의 위상에 맞는 문화는 성숙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