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애플 세계개발자대회(WWDC) 2016에서 눈길을 끈 부분은 애플의 변화였다. 애플은 그동안 프라이버시 문제를 이유로 폐쇄적인 정책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WWDC 2016에서는 음성인식 기능 ‘시리(Siri)’의 소프트웨어개발키트(SDK)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는 애플 소속의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시리를 응용한 앱을 개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애플의 이 같은 행보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고(故) 스티브 잡스가 회사를 이끌던 시절부터 유지해 온 ‘유아독존’식 폐쇄주의 전략으로는 더 이상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걸 애플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기술(IT) 업계 한 관계자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팀 쿡 최고경영자(CEO)의 스타일도 애플의 변화를 이끄는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수석부사장이 13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빌 그레이엄 시빅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WWDC 2016에 참석해 시리의 SDK를 외부 개발자들에게 개방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 위챗·우버와 연동되는 시리…“외부 개발자의 시리 사용 대환영”

WWDC 2016 첫날 무대에 오른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수석부사장은 시리를 향해 “친구에게 5분 늦는다고 위챗을 전송해줘”라고 말했다. 위챗은 중국 텐센트가 개발한 모바일 메신저다. 페더리기 수석부사장의 말이 끝나자 아이폰 화면에는 해당 문장과 전송 버튼이 나타났다. 버튼을 누르면 위챗으로 메시지가 보내진다.

시리는 매주 사용자들로부터 20억번의 요청을 받는다. 시리에 쌓이는 지식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애플은 여기에 외부 개발자들을 끌어들이면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페더리기 수석부사장은 “시리가 외부 개발자들을 만날 경우 할 수 있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애플은 그간 사생활 문제 등을 이유로 시리의 SDK를 공개하지 않았다. 시리에 축적되는 각종 음성정보가 최대 2년 동안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존 ‘알렉사’, 구글 ‘어시스턴트’, 마이크로소프트 ‘테이’ 등 경쟁사들의 음성인식 서비스가 대거 등장하자 애플도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수석부사장이 중국 텐센트가 개발한 모바일 메신저 위챗과 시리를 연동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아마존은 우버, 도미노피자 등 여러 기업들과 협력 관계를 맺고 차를 부르거나 피자를 주문할 때 알렉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 호평을 받았다. WWDC 2016을 지켜본 국내 IT 업계의 한 관계자는 “경쟁사들이 막강한 음성인식 비서를 대거 등장시키는 상황에서 애플이 시리의 입지를 지키려면 생태계를 개방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출의 60% 이상을 아이폰에 의지하는 애플 입장에서는 시리의 경쟁력 강화가 곧 아이폰의 판매량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프루언트는 “아이폰 사용자의 42%가 시리 기능이 크게 향상될 경우 차세대 아이폰을 재구매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고 발표했다.

애플은 올 가을 출시될 아이폰 신제품에 시리를 품은 모바일 운영체제(OS) ‘iOS10’을 탑재할 예정이다. 애플은 위챗뿐 아니라 왓츠앱, 우버, 알리페이, 핀터레스트 등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앱)과 시리를 연동해 iOS10의 위력을 한층 강화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쿡 CEO는 “개발자들과 함께 애플 생태계를 더 강력하게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가운데)가 WWDC 2016에 초대한 장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마이 웨이’ 잡스와 달리 다양성 존중하는 팀 쿡

서서히 빗장을 풀고 있는 애플의 태도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은 쿡 CEO다. 쿡 CEO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WWDC 2016 첫날 쿡 CEO는 미국 올랜도에서 발생한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제안하면서 “애플은 서로 다른 시각과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이미 하드웨어 분야에서는 과거의 ‘독불장군’식 고집을 버리고 시장이 선호하는 스타일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한다. 잡스 CEO 시절과 달리 쿡 CEO는 시장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대중성과 시장성을 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과거 잡스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중간 크기인 ‘패블릿’ 제품을 선호하지 않아 아이폰의 화면 크기도 3.5인치를 고집했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엄지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최적의 크기가 3.5인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쿡 CEO는 애플을 이끌기 시작한 뒤로 아이폰 시리즈의 화면 크기를 지속적으로 키웠다. 지난해 출시된 아이폰6s 플러스의 화면 크기는 5.5인치다.

고(故) 스티브 잡스(왼쪽)와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오른쪽)

또 잡스는 10인치 이하 크기의 태블릿PC 도입을 거부했다. 즉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지는 걸 극도로 경계한 것이다. 반면 쿡 CEO는 소비자의 선호도에 맞춰 태블릿PC 크기를 줄여나가는 경쟁사들에 대응하기 위해 7.9인치 ‘아이패드 미니’를 시장에 선보였다.

지난해 9월 9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빌 그레이엄 시빅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애플의 신제품 공개 행사도 쿡 CEO의 가치관을 잘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행사에서 쿡 CEO는 신형 태블릿PC ‘아이패드 프로’와 함께 스타일러스 펜 ‘애플 펜슬’을 공개했다. 애플 펜슬은 삼성 갤럭시노트5에 탑재된 S펜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용자는 애플 펜슬로 아이패드 화면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잡스는 생전에 “가장 뛰어난 필기도구는 손가락”이라며 스타일러스 펜을 평가절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잡스는 “애플 사용자 그 누구도 스타일러스 펜을 원하지 않는다. 스타일러스 펜은 잃어버리기 쉽다”며 도입을 극구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