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왔는데 주머니가 없네요. 스마트폰을 어디 두면 좋을까요?"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중국 스마트폰 업체 레노버의 신제품 행사장. 초대 손님으로 참석한 애니메이션 제작자 메건 매카시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C자 모양으로 구부려 팔찌처럼 손목에 걸었다. 그가 "그럴 땐 (몸에) 걸치면 된다"고 말하며 손을 들어 보이자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매카시는 이어 '접는 태블릿PC'도 소개했다. 일반적인 태블릿PC와 같은 모양이지만 반으로 접으면 스마트폰이 된다. 매카시는 "중요한 전화가 오면 접어서 받고, 다시 펴면 태블릿에 떠 있던 화면을 그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대표적인 IT(정보기술) 기업 레노버가 세계 최초로 구부러지는 스마트폰과 접는 태블릿PC를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물량 공세로 세계 시장을 공략했던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기술에서도 앞서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점유율을 늘려 왔다면 이제부터는 신기술로 무장한 제품을 삼성전자애플보다 먼저 선보이며 프리미엄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휘는 스마트폰, 가상현실 폰… 중국이 먼저 내놓는다

스마트폰·태블릿을 접고 구부리는 것은 시장의 판도를 바꿀 차세대 기술로 불린다. 제품 크기를 줄여 휴대성을 높이고 디자인도 다양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번 접었다 펴고 구부릴 수도 있는 디스플레이 개발과 내부 부품 구성이 어려워 실제 제품은 지금껏 나오지 못했다. 스마트폰 세계 1위 삼성전자도 비슷한 스마트폰을 개발 중이지만 아직은 시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레노버가 선수를 친 것이다. 레노버는 이르면 내년 초부터 이들 제품을 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레노버는 한때 미국 최고의 스마트폰업체 모토롤라를 인수하며 선두권 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이 글로벌 기업들의 소프트웨어와 핵심 부품을 삼성이나 애플보다 앞서 스마트폰에 적용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구글의 가상현실(VR) 플랫폼 '데이드림'을 지원하는 스마트폰도 중국에서 가장 먼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구글의 야심작인 데이드림은 스마트폰과 헤드셋, 동작 인식 조종기 등 가상현실 콘텐츠 이용에 필요한 각종 기기를 연동시키는 프로그램이다.

미국 가상현실 콘텐츠 업체 '넥스트VR'의 데이비드 콜 CEO(최고경영자)는 "중국 스마트폰업체 러(Le)에코가 데이드림 스마트폰을 가장 먼저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러에코는 중국에서 동영상 콘텐츠 업체로 출발해 스마트폰·TV 등 기기 제조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올해 초 미국 퀄컴의 스마트폰용 최신 반도체 '스냅드래곤 820'을 세계 최초로 탑재한 스마트폰도 러에코 제품이었다.

스마트폰의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대용량 메모리 채택도 중국 업체들이 이끌고 있다. 메모리 용량이 커지면 여러 개의 앱(응용 프로그램)을 동시에 실행해도 스마트폰 데이터 처리 속도를 빠르게 유지할 수 있다. 중국 스마트폰 업체 비보는 지난 3월 6GB(기가바이트) 용량의 메모리를 탑재한 제품을 세계 최초로 출시했으며 이어 레노버와 원플러스가 6GB 메모리를 탑재한 제품을 차례로 내놨다. 애플의 경우 메모리 용량이 2GB에 머물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지난 3월 4GB 메모리의 갤럭시S7을 출시한 데 이어 하반기부터 6GB 메모리 제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한국에 직격탄 될 수 있어

미국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올 1분기 세계 스마트폰 판매량 상위 12개 기업 중 중국 회사가 8곳을 차지했다. 단순한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제품의 품질과 기술력에서도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중국 내수 시장에만 머물지 않고 본격적으로 인도·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세계 1위의 통신 장비업체인 화웨이 스마트폰은 선진 시장으로 분류되는 유럽에서도 1분기 돌풍을 일으켰다.

물론 중국 업체들의 기술력 과시에 대해 눈길 끌기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휘어지는 스마트폰을 시제품으로 하나 내놓았다고 해서 당장 양산(量産)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며 "다른 기능이나 사양도 실제 소비자의 선택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레노버의 접는 태블릿PC가 아직은 마케팅용 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정동 교수(산업공학)는 "중국 업체들이 한국을 완전히 앞선 것은 아니지만 발전 속도만큼은 한국보다 훨씬 빠른 게 사실"이라며 "한국은 경쟁력 있는 부품과 소재의 혁신을 통해 기술 격차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