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현지도(石城縣地圖, 규10393), 조선후기 지방지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석성과 강경 위치. 네이버 지도 참조

조선시대 석성현은 부여군 석성면과 논산시 성동면을 관할하던 작은 고을이었다. 옛 군현명은 석성면으로 남아 있다. 옛 지도에 등장하는 객사는 석성면 석성리, 석성초등학교 자리로 전해진다. 그래서 학교로 가 보았다.

석성초등학교

큰 돌로 만들어 놓은 개교100주년 기념비가 보인다. 1908년 5월 1일에 개교한 학교이다. 기념비 옆의 느티나무는 1979년에 보호수로 지정했는데 그 때 수령이 310년이라고 기록하였다. 느티나무와 100년 넘은 학교가 이곳이 옛 관아 자리였음을 암시할 뿐 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석성동헌

부여 관광안내도에 석성 동헌이 등장하기에 학교 주변을 걸어보았다. 석성 1리 마을회관이 보인다. 마을 회관 왼쪽에 오래된 건물이 보이는데 이 곳이 석성동헌이다. 석성현이 독립된 군현이 된 것이 조선 태종 15년(1415)이고 이 동헌 건물은 인조 6년(1628)에 세우고 1712년, 1737년에 고쳐 지었다.

선정비와 동헌 앞 길

옛 지도를 보면 동헌 앞에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이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동헌 앞의 길 위에 이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헌 건물 앞 길가에 비석들이 보인다. 석성현 현감들의 선정비들이다.

객사는 사라지고 동헌도 제대로 관리되고 있진 않았으나 동헌 앞으로 난 길이 조선시대 석성현의 중심도로였음은 분명하다.

석성 향교

동헌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향교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1623년에 다시 세웠다. 석성현에서 석성면으로 바뀐 작은 고을의 향교이다보니 입구의 홍살문도 낡았다. 이름만 남은 군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정각사 대웅전

옛지도에 등장하는 장소 중에서 딱히 가 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나마 들러보고 싶은 곳이 정각사(正覺寺)였다. 태조산 아래 명당처럼 그려진 곳에 세워진 절이다. 좁은 산길을 따라 정각사에 도착했다. 옛지도에 등장하는 절은 대부분 크고 화려한데 이 절은 규모도 작고 소박하다. 답사해 본 사찰 중에서 대웅전이 제일 작은 절이었다. 조용히 한 번 들러볼 만한 절이다.

원목다리

이제 금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금강변의 강경으로 향했다. 강경의 동쪽에서 금강에 합류되는 두 하천이 논산천과 강경천이다. 먼저 논산시 채운면에 도착했는데 채운면에도 작은 하천이 흐른다. 논산천에 유입되는 원항천이다. 원항천과 강경천에 오래된 다리가 있다고 해서 찾아 보았다.

관광안내도에 원목다리(院項橋)가 등장하고 오는 길에 안내표지판도 보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하천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 철길 옆에 숨겨져 있는 작은 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옛 다리이다보니 강 위가 아니라 강 옆에 옮겨다 놓았다. 원목다리를 가까이 가서 보기 위해 철로 옆을 걷는데 때마침 기차가 지나간다. 호남선(강경선) 기차이다. 다리는 하천이 아니라 길이다. 옛 길 옆에 철로가 생긴 것이다.

미내다리

원목다리보다 규모가 더 큰 다리가 강경천의 미내다리이다. 조선시대에 육로를 통해 충청도에서 전라도를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논산의 3대 명물이 개태사의 솥, 관촉사의 미륵, 그리고 이 미내다리이다. 지금은 강경천으로 부르지만 예전에는 미내천(渼奈川)으로 불렀기에 미내교(渼奈橋)라고 하였다. 이 미내교는 조암교(潮岩橋)라고도 한다.

조선전기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은진현 편에 조암교(潮巖橋)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조암교 : 증산포(甑山浦)에 있다. 옛날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그곳 거주민들이 술자(術者)의 말을 믿고 그 돌을 다 물에 던져버려서 지금은 나무로 다리를 놓고 다닌다. 아래에 바위가 있는데 조수(潮水)가 물러가면 보이기 때문에 이름하기를 조암(潮巖)이라 하였다.’

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전기에는 나무다리였지만 답사가면 볼 수 있는 다리는 돌다리이다. 영조 7년(1731)에 건립된 다리이다. 중간에 새로 돌을 끼워 넣었지만 멋지다.

예전에는 이 다리를 걸어서 건너 다녔지만 지금은 미내다리에서 보이는 현대식 긴 다리 위로 호남선 KTX 기차가 지나간다.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원목다리는 보지 않더라도 강경에 답사를 왔다면 이 미내다리는 꼭 보고 가길 권한다.

옥녀봉

강경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이다. 금강의 교역 중심지가 강경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강경포(江景浦) : 강경산(江景山) 아래에 있는 해포(海浦)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강경산이 지금의 옥녀봉이다. 43.9m이지만 이 곳에 오르면 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앞에는 금강이 흐르고 뒤쪽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옥황상제의 딸이 이곳 아래에서 목욕하고 놀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옥녀봉이라 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동네할머니들이 노래 부르며 놀고 계셨다. 가장 높은 곳에는 큰 나무 두그루가 보인다.

옥녀봉 봉수대

오른쪽 나무 옆에 봉수대를 새로 만들어 놓았다. 대동여지도에도 봉수대를 표시하고 강경대라고 적어 놓았다. 강을 끼고 딱 트인 곳이니 봉수대가 있을만한 곳이다. 이곳에서 여든 넘은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는데 강경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3대 시장에 해당하였고 정말 많은 배들이 들어왔고 큰 장이 섰던 곳이라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셨다.

기독교 한국 침례회 최초 예배지

큰 강을 끼고 있는 교역의 중심지였으니 서양사람들도 들어오고 일본사람들도 이곳에 들어왔다. 봉수대에서 내려오면 초가집이 한 채 보인다. 기독교 한국 침례회에서 한국 최초로 예배를 보던 장소이다.

안내문을 살펴보면 조선 말에 강경과 인천을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의 집이었는데 1896년에 이곳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곳이라고 되어 있다. 이 집 옆이 1897년에 설립된 강경침례교회 터이다. 강경침례교회가 한국침례회 최초 교회이다. 복원 공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전국에 일본 신사를 짓는데 강경에서는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옥녀봉에 건립하였다. 강경침례교회도 일제가 불태우고 신사의 부지로 사용하였다.

교회 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안내표지판이 보여 가보니 조선식산은행 지점장 관사라고 되어 있다. 조선식산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경제 침탈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강경역사관

답사를 다니고 설명을 읽는다고 쉽게 강경의 옛 모습이 상상되는 건 아니다. 옛 사진을 보기 위해 강경역사관으로 향했다. 1905년에 한호농공은행이 생겼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되었다.

강경역사관은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이 해방 후에는 한일은행 강경지점,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바뀌었다.

건물 안에 전시된 옛 사진들을 통해 배가 다니던 금강, 일제 강점기의 강경, 해방 이후 강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큰 장이 섰던 강경은 옛 모습을 잃고 젓갈시장으로만 알려져있다. 강경 읍내에 연달아 보이는 젓갈 판매 간판을 보면서 세상은 변하고 경관은 바뀌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달라짐을 깨닫는다. 세상이 변했다는 건 삶의 지도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