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보화 운동의 시작을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그리고 여기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오는 세기는 다시 암흑과 침체의 옛 역사를 되풀이할지 모른다. 100년 전 우리는 거함대폭에 무릎을 꿇고 나라를 내주었다.(1995년 3월 5일 조선일보 창간 75주년 정보화운동 선언 ‘사고’에서 발췌)

“당시 컴퓨터를 모르면 세계화 시대를 앞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보화 혁명에 조선일보가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보화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환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언론이 인터넷·ICT(정보통신기술) 강국의 위상을 만든 주역은 아닐지 몰라도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 후방을 든든히 지원했다고 자부합니다.”

안병훈 통일과나눔재단 이사장은 1995년 조선일보 편집인 시절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정보화 혁명을 국가적 이슈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캠페인을 통해 한국이 다가오는 정보화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공론의 장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안 이사장은 “당시 조선일보에는 정보화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젊은 기자들이 유난히 많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은 안 이사장이 전문가 의견을 경청하고 산업 현장을 누비는 젊은 기자들의 목소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안 이사장은 1965년 조선일보 공채 8기로 입사해 조선일보 편집국장, 편집인, 부사장을 거쳐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일보 재직 시절 환경 캠페인 ‘쓰레기를 줄입시다’(1992년 시작), 정보화 캠페인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1995년 시작)를 주도했고 춘천 국제 마라톤 대회(1995년 시작)의 발판도 마련했다.

안병훈 통일과나눔재단 이사장

안 이사장은 조선일보 퇴직 후인 2006년 출판사 기파랑을 설립했으며 2007년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 선거대책본부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서재필기념회 제4대 이사장 등도 맡고 있다. 출판사 기파랑은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 역사교과서 바로잡기 등에 관한 책을 주로 냈다. 2008년 3월 기파랑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발간했고, 2011년 8월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2012년 12월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박정희’ 사진집을 출간했다.

서울 동숭동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골목길을 여러 번 돌고 돈 끝에 기파랑이 입주한 동숭빌딩을 찾을 수 있었다. 기파랑 출판사가 있는 3층 사무실에는 주로 한국 근대사 관련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안 이사장을 만나 당시 정보화 캠페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젊은 기자 목소리 귀 기울여...정보화 포럼 시작으로 정보화 캠페인 주도

― 1995년 3월 조선일보가 ‘정보화 운동’을 선언하고 정보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조선일보 편집인 시절이었습니다. 편집국장과 현장 기자들은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는 데 가만히 있으면 큰일이 난다고 강조했습니다. 언론이 바뀌어야 정보화가 가능하다면서 (기자들이) 허진호씨(아이네트 창업자), 정철씨(휴먼컴퓨터 창립자),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의 아들 이홍선씨 등 당시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앞서 있던 전문가들을 방상훈 사장과 만나도록 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보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편집국에서 정보화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 기자들이 미국 기술 전문 전시회인 ‘컴덱스(COMDEX)’ 취재를 다녀온 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공무원을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한국의 공무원은 무관심하다 못해 아예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어 큰일났다는 얘기였습니다. 문제의식을 지닌 기자들과 정보화 포럼을 한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전문가들과 공무원들을 모았고 포럼을 시발점으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조선일보 1995년 3월 5일자 1면에 실린 창간 75주년 정보화 캠페인 기사

―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캐치프레이즈는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이어령 교수가 정보화 포럼에서 ‘산업화가 늦어서 우리가 식민지가 됐는데, 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듣는 순간 속으로 ‘이거구나’ 했습니다. 조선일보 창간 75주년에 맞춰 국가 어젠더로 잡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보화 혁명에 조선일보가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 평소에 정보통신 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젊은 기자들의 문제의식을 열심히 들은 덕분이지 제가 정보기술 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선일보 정보화 캠페인을 시작하기 한참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교수와 대화하던 중 이 교수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한국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새로운 변화의 시대는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1면 시리즈로 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나라 최초로 워드 프로세서, 그러니까 컴퓨터로 기사 원고를 만드는 시도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기자들이 펜이나 타자기로 원고를 썼습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된 1985년에 처음으로 컴퓨터로 원고를 쓰는 시도를 했습니다. 국내 신문사 중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정보화 캠페인만으로는 동력이 부족했을 것 같습니다.

“지도자가 정보화를 알지 못하면 앞서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국가를 이끄는 CEO(최고경영자)는 결국 대통령입니다. 그래서 故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2년 대통령 후보 시절 우리가 컴퓨터를 각 당의 사무실에 들고 가 후보들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연출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찍고 정보화 관련 공약을 발표하도록 한 것이지요.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정보통신특별보좌관 같은 자리를 만들겠다’고 공약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비슷한 공약을 했습니다.”

◆ “초등학생이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날개가 컴퓨터”...정보화 공감대 이끌어내

― 정보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물론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습니다. 90년대 초 신문사도 편집국에 컴퓨터를 도입하는 정보화 물결에 휩싸일 때였습니다. 신문사 전산화를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라고 불렀는데, 어떤 방식으로 가야 하는가를 두고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또 당시 지면에 ‘컴퓨터를 배웁시다’ ‘영어 배웁시다’ 등 컴퓨터 관련 지면을 만들었습니다. 일반 독자들이 컴퓨터를 잘 모르는 시대에 그런 지면을 만드니, 편집국 안에서 반대가 많았지요. 하지만 컴퓨터와 영어를 모르면 세계화 시대에서 앞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편집국에 ‘초등학생 때부터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컴퓨터 아니냐’는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 등을 초청해 편집국에서 강의도 많이 했습니다. 그 때 이용태 회장이 교육 시스템도 컴퓨터로 바꾸어야 하고 심지어 농사일까지도 다 컴퓨터로 해야 하는 세상이 온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1995년 ‘정보화는 앞서가자’에 이어 1996년 초등학생에게 인터넷과 컴퓨터를 가르치는 키드넷(KidNet) 운동도 펼쳤습니다.

“정보화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유치원 학생들부터 인터넷과 컴퓨터를 가르쳐야겠다는 공감대가 편집국에 있었습니다. 젊은 기자들이 주로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미시간대 임길진 박사가 어린이에 대한 인터넷 교육 운동 아이디어를 내고 키드넷 운동을 펼치자고 제안했고 1996년 3월부터 키드넷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키드넷 운동은 한국의 인터넷 대중화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전국 36개 초등학교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초등학교를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것을 시도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초등학생들이 인터넷에서 서로 대화를 하도록 시도한 것입니다. 서울 한양초등학교에서 한미 초등학교 인터넷 자매결연 시범행사를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에는 인터넷 전용회선이 깔려있지 않았습니다. 전화밖에 없었는 데, 전화선도 교장실에 하나, 교무실에 하나 등 두 개만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미국에 인터넷으로 연결하기 위해 전화선 하나를 사용하면 교사들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통신회사 도움을 받아 키드넷 참여학교에 인터넷 전용회선을 설치해줬습니다. 또 영어를 못하는 초등학생들을 위해 대학생 자원봉사자도 붙였습니다. 컴퓨터가 없는 경우도 많아서 컴퓨터 나눠주기 운동도 벌였습니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도 출신 초등학교(경남 거제)에 컴퓨터 살 돈을 내기도 했습니다.”

◆ 인터넷 시대의 언론 환경 변화 거부할 수 없어...언론 본연의 임무는 동일

― 정보화 캠페인을 20여 년 전에 진행했습니다. 당시 정보화 캠페인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언론인으로 있는 동안 가장 보람있던 일이 ‘쓰레기를 줄입시다’라는 구호로 시작한 환경운동을 비롯해 정보화운동,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등이었습니다. 정부가 까막눈이었고 저도 정보화에 뒤늦은 사람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정말 보람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론사가 정보화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보배 같은 젊은 기자들 덕분입니다.”

― 정보화 혁명은 언론사가 주도했는데, 정작 언론사들은 인터넷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인터넷, 모바일 시대 언론사는 어떻게 해야 발전할 수 있을까요.

“종이신문의 부수가 줄어들 수 있지만 영향력은 지속될 것이라고 봅니다. 언론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는 명제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자들이 흥미 위주의 기사 콘텐츠 대신 정확하게 보도된 내용을 찾고 싶어 할 때 꼭 찾는 매체가 된다면 그 언론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에서 언론 환경의 변화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20년 전과 달리 언론사가 캠페인을 해도 영향력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떠도는 사실을 정규 TV 방송이나 신문 지면에 그대로 중계하듯이 소개하는 것은 권위 있는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관심사가 다양해진 만큼 다양한 관심사를 독자들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한다면 언론사는 분명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 현 정부에서 미래창조과학부나 박 대통령의 정보화 관련 리더십은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부 부처 명칭을 바꾸는 것은 지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문화교육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지요. 노동부면 충분한데 고용노동부로 바꿔야 할까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모든 간판을 바꿔야 하고 그동안 고민하고 만들어왔던 모든 서류를 다 버려야 하는 걸까요. 간판이 바뀌면서 새로 만들어야 하는 문서에 들어가는 예산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처 이름을 굳이 바꿔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 부처 명으로 새로운 흐름을 담을 수 없다면 바꿀 수도 있겠지만, 노동부나 행정부처럼 국가 발전의 버팀목이 되는 정보통신 산업이나 과학기술 분야에 혼란을 줘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언론사간 경쟁도 심하다. 그런데 1997년 1월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신문 지면이 만들어진다. 1997년 1월 9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정보화 캠페인 시리즈 10회를 동시에 다룬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내용의 기사를 두 신문 지면에 동시에 싣는 것은 한국 언론사에서 전무한 일이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조선일보 1997년 1월 9일자 1면 캡처(왼쪽). 조선일보 1996년 5월 2일자 1면 캡처

발단은 안병훈 이사장이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맡았을 당시 오명 체신부 차관과의 인연이었다. 체신부 출입기자가 우체국이 저금한 돈을 버스로 실어 날라 도둑맞기 쉽다는 고발 기사를 썼다. 안 이사장은 당시 기자의 문제의식은 좋지만 도둑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오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특별 수송 차량을 마련하든지 사고를 막을 방책을 마련하라고 얘기했다. 당시 오 차관은 기사를 게재하지 않고 조언한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수 년이 흘러 오 차관은 1996년 6월 동아일보 사장이 됐다. 어느날 오 사장이 안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정보화 운동을 공동 캠페인으로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안 이사장은 흔쾌히 ‘오케이’ 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공동 캠페인이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양 사의 편집국 기자들이 공동캠페인을 꺼렸다. 왜 경쟁 언론사와 공동으로 같은 내용의 캠페인을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안 이사장은 당시 “경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공감대를 얻는 어젠다를 보다 많은 독자에게 전달하는 취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편집국 기자들을 설득했다.

그런데 공동 캠페인 시리즈 기사가 게재되기로 한 첫 날인 1997년 1월 9일자 가판(하루전 저녁에 인쇄하는 다음날 신문의 초판)이 문제가 됐다. 8일 저녁에 인쇄된 조선일보 가판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 공동 캠페인’ 기사가 실렸는데 동아일보 가판에는 기사가 실리지 않은 것이다.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공동 캠페인에 반대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월 9일 아침에 배달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나란히 정보화 캠페인을 공동으로 진행한다는 기사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