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서양의 근대가 기이하게 접붙은 1930년대의 저택
기모노, 더블 수트, 하녀복, 하이웨이스트 드레스가 유영하는 고딕 패션쇼

끌로드 모네의 그림 '양산을 쓴 여인'이 연상되는 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

영화 '아가씨'의 주무대는 1930년대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조선인 대부호 코우즈키의 저택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일본 건축 양식의 하나인 음예의 기운이 듬뿍 내려 앉은 일본식 세트와 서양식 건물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이 스크린에 연극 무대처럼 펼쳐진다.

일본과 서양의 근대가 기이하게 접붙은 이 영화에서 가장 남루하게 다뤄진 복식은 한복이다. 소매치기 소굴인 보영당 하층민들이 입은 한복은 코우즈키 저택 하녀들의 어두운 빛깔의 한복들로 이어진다. 하녀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짙은 무명천, 넓은 동정, 둥둥 걷은 소매 아래로 적당히 때가 묻은 흰색의 커다란 앞치마만 도드라질 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녀의 유니폼은 앞치마가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푸른 곰팡이 같은 옷을 입고도 종마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생명력을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하녀 숙희다.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아가씨'의 포스터 비주얼.

소녀와 처녀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김민희는 일본 귀족이다.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의복은 만지면 녹아버릴 듯, 혹은 뽀드득 소리가 날 것만 같은 그녀의 맨 몸. 더불어 가냘프고 기다란 그녀의 몸 위로 걸쳐진 20세기 초반의 길고 부드러운 의상들은 신비스런 분위기를 더한다.

3D 영화가 아닌데도 옷감의 프린트들이 튀어나오듯 생생하다. 1, 2, 3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흐름에 따라 김민희가 분한 히데코의 의상도 각각의 장에 맞게 치밀하게 계산된 것.

1장에선 유약하고 순수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화이트나 아이보리, 카키 등의 차분하고 정숙한 색상과 레이스, 실크, 시폰 등 부드러운 느낌의 소재들이 등장한다. 반면 2, 3장 에서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히데코의 색다른 매력을 주기 위해 채도를 높힌 유가타와 기모노 의상들이 캐릭터의 극적 변화를 표현한다.

다른 주인공들과 함께 있는 초록색 오프 숄더 드레스와 영화 초반에 나온, 속살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바이올렛 블라우스와 긴 강갑은 그 컬러와 질감만으로 서양화 속 모델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영화에서는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총 25벌의 의상이 등장한다.

김민희의 기다란 팔과 잘 어울리는 긴 장갑. 아가씨 히데코의 보라색과 초록색 의상은 복잡하고 신비로운 내면 세계를 상징한다.

1부에서 등장했던 쇄골이 드러나는 레이스 칼라의 블라우스, 정원을 거닐 때의 빨간 앵두같은 프린트가 수놓인 흰 드레스, 백작과의 간식 식사 때 입었던 초록색 드레스는 배우 김민희도 가장 마음에 드는 옷으로 꼽기도 했다.

특히 기모노는 영화의 판타지를 좀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준다. 일본의 전통의복인 기모노는 어깨 처짐이 없이 직선으로 만들어져, 입었을 때 여유분이 겨드랑이 밑으로 주름져 늘어진다. 이를 오비(허리띠)로 허리에 죄어 매는 스타일이다. 단추나 매듭이 따로 없기 때문에 잠깐만 방심해도 매무새가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닫힌 내면을 상징하듯 히데코의 기모노는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실루엣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매무새가 완벽하다. 반면 1910~20년대 다이쇼 시대의 일본 귀족들이 즐겨 입던 검정색 실크 기모노를 착용한 후견인 코우즈키의 기모노는 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어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일본을 동경하고 경외하는 코우츠키 조진웅, 일본을 이용하려는 백작 하정우는 한국인임에도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완벽한 일본인의 복장을 갖추고 있어 둘의 욕망이 결국은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백작으로 분한 하정우는 당시 서양에서 유행했던 밀집모자에 베스트까지 갖춰 제대로 입었다. 몸에 꼭 맞게 디자인된 요즘 슈트와는 달리 재킷의 품도 바지 폭도 여유가 있다.

서구 미술계에 한때 유행했던 일본풍 그림이 연상되는 복식.

영화 의상을 담당한 조상경 의상 감독은 같은 20세기 초반이라 해도 1910년, 20년, 30년대 등 각 시대에 따라 약간씩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아가씨'는 1910년대에 촛점을 맞췄다고 한다. 아가씨가 후견인의 저택에 들어온 이후 아가씨의 시간도 정지된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각 의상은 짧게는 한 벌 당 1개월, 길게는 4개월이 소요될 만큼 꼼꼼하고 치밀하게 제작되었다.

조상경 감독은 귀족 아가씨의 신분에 맞는 옷을 제작하고 선택했지만 아가씨의 감정의 결을 따라가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즉 의상 속에도 감춰진 속내와 위트가 드러나길 바란 것. 결과적으로 '아가씨'에는 벨 에포크 시대의 의상부터 프랑스 삽화와 그림 등의 흔적이 자주 읽힌다. 교토를 오가며 그 귀하다는 기모노 원단을 구한 영화 의상팀의 노력은 확실히 빛을 발한다.

◆ 조명숙은 패션미디어 마담 조 대표이자 '보그코리아' 전 패션 디렉터 출신 독립 저널리스트다. 프랑스 패션지 '마리끌레르'를 거쳐 런던의 센트럴 센 마틴에서 공부했다. 최근에는 강의 활동과 더불어 패션 관련 서적을 집필하고 있으며, 마담 조라는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패션 미디어 혁명을 꾀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마담 조는 올여름 오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