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해고되면, 해당 정보가 곧바로 이웃에게 전달돼 ‘퇴출’ 압박을 받게 된다. 무직자의 존재는 집값 하락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내 점심 메뉴는 자체 개발한 앱을 통해, 부서원들의 손떨림, 심박수를 통해 정해진다. IT소설집 ‘10년 후의 일상’에 수록된 33편의 짧은 소설은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발전한 10년 뒤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을 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인 2026년 우리의 흔한 일상을 보여주는 단편 소설 7편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귀에 착용한 귀걸이로 통화하고 립스틱으로 음성 명령 내려
더 이상 스마트폰 같은 복잡한 통신 기기는 필요치 않아

엄성훈 그림

“저기 귀걸이 떨어졌어요!” 나는 손짓까지 해가며 귀걸이를 떨어뜨리고 간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필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중요한 회사 일이었다. 대충 전화를 끊고 눈을 들자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떨어지고 있는 사이로 저 너머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자동차에 부딪혀 쓰러지던 그녀가 보였다.

나는 한 달간 번민에 사로잡혔다. 그때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지만 않았어도 아니, 그녀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내가 따라잡았더라면 아니, 횡단보도가 더 먼 곳에 있었더라면 아니, 내가 처음부터 이 ‘무료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스물넷밖에 안 된 어린 여자였다. 직업은 없었고 기가 막히게 가난했다. 그녀가 먹고살 만했다면, 으레 그렇듯 기능성 귀걸이를 양쪽 귀에 모두 착용했을 것이다. 그녀가 한쪽 귀에만 착용한 귀걸이는 통화 기능뿐 아니라 고성능의 보청기 기능까지 겸한 것이었다.

그녀는 귀가 거의 멀어 있었다. 집이 어느 정도만 살았어도 보통 사람들처럼 고막 바깥쪽에 콘택트필름 정도는 착용했을 텐데. 어쨌든 그래서 그녀는 내가 뒤에서 목청껏 외쳤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것이다. 귀걸이가 떨어진 다음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을 테니까.

경찰 조사 결과, 평소 그녀는 집에서 귀걸이를 거의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만약 집에서도 귀걸이를 착용했다면 그녀는 갑자기 사라진 길가의 소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의아해했을 텐데, 그녀에게 무음의 세계는 가장 익숙한 세계의 형태였던 것이다.
나는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발랐다. "장 비서 개인 전화로 연결해 줘."

이 립스틱은 최신 제품이었다. 입술에 바르는 것만으로도 음성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전화를 걸고 받을 수도 있다. 예전의 스마트폰과 같은 복잡한 통신 디바이스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통신망도 필요 없다. 예전의 무선 통신망은 기지국부터 중계기까지 유선 기반이었고, 근처의 중계기에서 사람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까지만 무선이었다.

이제는 그런 네트워크마저도 필요 없이 모든 것은 릴레이 방식으로 처리된다. 내가 들고 있는 디바이스는 반경 10km 내의 디바이스까지 신호를 전달할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최종 수신까지 중간의 디바이스들이 통신 정보를 계속 옮긴다. 고도화된 압축 기술과 주파수 해석 기술로 가능해진 일이다.

모든 디바이스를 연결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사물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은 광대역 통신 기술이었다. 이때 혁신적으로 등장한 것이 한참 쓰이지 않았던 삐삐 네트워크였다. 비싼 통신망을 쓸 필요 없이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과거의 버려진 통신망을 활용해 사물인터넷 네트워크를 완성한 것이다. 이후에 압축 기술과 주파수 해석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람 간의 통화까지 통신사의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게 되었다.

통신사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스마트폰이나 웨어러블(wearable)디바이스를 만드는 회사도 사라졌다. 한때 스마트폰이 많은 기능을 가진 컴퓨터였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 그 기능들은 전부 작고 값싼 디바이스로 분화되었다. 가령 음성통화를 할 때 스마트폰을 귀와 입에 갖다 대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허공에서 말하고 듣는다면 그것보다 편한 것은 없다. 물론 허공에서 말하고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그녀의 귀걸이나 나의 립스틱 같은 새로운 디바이스가 존재한다. 립스틱은 나의 위치 정보를 인식하고 매개해 주는 통신 물질이다.

“장 비서, 나야. 앞으로 세 달 동안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만드는 회사에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장애인들 데이터만 보이도록 자료를 넘기도록 해. 그들이 그나마 약간의 돈이 있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에 집중할 수 있게 말이야.”

나는 새로운 차원의 통신 네트워크를 만든 장본인이다. 나는 이 기능을 모든 제조사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대가로 한 사람이 몸에 착용하고 있는 디바이스의 종류에 관한 데이터를 넘겨받기로 했다. 그런 다음 우리 회사는 한 사람마다의 디바이스 해부도를 그렸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려진 개인의 신체도에 그 사람이 머리카락과 목, 귀와 엉덩이 등 어디에 디바이스를 착용하고 있는지를 파악해 그렸다. 그리고 세부 조회를 해 어느 회사의 제품을 언제 얼마의 가격에 샀는지도 기록했다. 우리는 이런 정보를 전부 모아 각 제조사별로 아직 비어 있는 디바이스 공간에 대한 정보를 팔았다.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통신료와 스마트폰을 팔지 않고, 결국 모두를 위한 데이터를 파는 것이다.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파는 회사는 누구에게 팔아야 하는지 알 수 있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구매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청각 장애인인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 오늘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앞으로 세 달간은 장애인이 갖고 있지 않은 디바이스에 대한 데이터만을 각 제조사에게 넘길 것이다. 물론 장애인은 필요하다면 돈을 주고 구매해야겠지만, 어쨌든 이를 통해 내가 만든 데이터 서비스 때문에 사람이 죽을 가능성은 더 줄어들 것이다.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다 립스틱 전화를 끊었다.

10년 후의 일상 | 편석준 지음
근미래 소설 '10년 후의 일상'의 작가 편석준은 IT대기업을 다니던 회사원이었다가 스타트업 창업을 한 CSO였다. 그리고 생애 최초로 작가로서의 시간을 올곧이 보내며 인공지능 시대의 IT소설집을 냈다.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 최종심에 응모작 3편이 오른 적이 있다. 총 33편이 실린 이 소설집은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발전한 10년 뒤의 세계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을 담고 있다. 먼 미래의 과학 발전을 소재로 하는 기존의 SF소설보다는 가까운 미래의 과학을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했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공평성을 기하기 위해 '점심 메뉴 결정 앱'을 사용하는 정도의 근미래가 오히려 현실성있게 느껴져 줄거리에 몰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