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셋은 18년 전 자본금 100억원으로 시작해 현재는 자산운용·증권·보험사를 중심으로 운용자산만 357조원에 이르는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이후 금융에서 태어난 거대 독립금융그룹은 미래에셋이 유일하다. 지난해 대우증권을 인수하면서 자기자본 8조원의 초대형 증권사 출범도 앞두고 있다. 조선비즈는 한국 자본시장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한 미래에셋그룹을 심층 취재했다. [편집자주]

지금부터 약 5개월 전인 2015년 12월 21일 저녁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오랜만에 즐긴 낮술에 한껏 취해있었다. 이날 미래에셋증권 사외이사들과 함께한 점심 자리가 저녁까지 이어졌다. 박 회장은 이날 점심때 시작해 저녁 늦게까지 15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이렇게 낮술에 취한 것은 미래에셋을 설립한 후 18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이 날은 KDB대우증권(이하 대우증권) 본입찰 마감일이었다. 박 회장은 인수가격으로 2조4000억원을 써내도록 지시했다. 이변이 없는 한 대우증권 인수의 승자는 미래에셋증권이 될 터였다. 미래에셋에 대우증권 인수는 분명 기회다. 미래에셋이 또 한차례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합병이 순조롭게 흐르지 않거나 생각지 못한 돌발 변수들이 튀어나온다면 회사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맨정신으로 하루를 보내기가 쉽지 않은 날이었다.

사흘 후인 12월 24일, 미래에셋증권은 한국투자증권과 KB금융지주를 제치고 대우증권 인수전의 최종 승자가 됐다. 금융계는 물론 미래에셋증권 직원들도 깜짝 놀랐다. 애초 사내에서는 박 회장이 대우증권 인수에 2조원 초반을 쓸 것으로 생각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도 기껏해야 2조2000억원이 인수 최고가라는 말이 돌았다. 2조4000억원. 대우증권을 반드시 인수하겠다는 박 회장의 의지는 그만큼 강했다.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증권의 통합 작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면 7월 금융위원회의 합병 승인과 9월 합병 주주총회 등을 거쳐 이르면 10월 자기자본 8조원의 압도적인 국내 1위 증권사가 출범한다. 1997년 박현주 회장이 동원증권을 퇴사하고 8명의 동료와 의기투합해 미래에셋을 설립한 지 18년 만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 자산규모 1위…설립 17년 만에 국내 최대 증권사 올라선 미래에셋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대우증권은 지난달 ‘미래에셋대우’로 사명을 변경한 후 13일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개최해 박현주 회장을 회장으로 선임하기로 의결했다. 미래에셋대우가 존속법인으로 남고 미래에셋증권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병이 확정됐다.

통합 미래에셋대우는 오는 11월 1일 정식으로 출범한다. 미래에셋대우의 자기자본은 2조원의 자기주식을 포함해 총 7조8000억원에 이른다. 자기자본 규모로 국내 2위인 NH투자증권(005940)의 자기자본은 4조5000억원, 지난달 현대증권을 인수하며 3위로 뛰어오른 KB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4조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지난 1999년 설립 후 지난해까지 자기자본 규모가 국내 5위권에도 미치지 못했던 미래에셋이 대우증권 인수에 성공한 뒤 단숨에 국내 최대 규모의 증권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미래에셋증권은 1년 먼저 설립된 계열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에 비해 성장세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다. 미래에셋운용이 설립 후 18년간 다양한 히트상품을 내놓으며 자산운용업계 1위로 도약한 사이 미래에셋증권은 증권업계에서 이렇다 할 경쟁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금융시장 일부에서는 미래에셋증권을 일컬어 ‘미래에셋운용의 펀드 판매사’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에셋증권은 대우증권을 합병하게 되면서 그동안 약점으로 지목돼 온 투자은행(IB)과 주식중개 사업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게 됐다. 강점이었던 자산관리와 연금 등에서의 사업에 이어 IB와 주식중개, 해외투자 등에 이르기까지 증권업의 주요 사업들에서 모두 업계 선두권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 대우증권 인수 막전막후…KB·한투 물 먹인 미래에셋의 '기습 공격'

2010년 완공된 미래에셋센터원. 현재 미래에셋증권, 자산운용, 생명(운용본부) 본사가 들어와 있다.

애초 금융시장에서는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미래에셋증권이 다소 힘에 부칠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경쟁 상대였던 KB금융지주는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금융투자업에서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과감한 베팅에 나설 것으로 전망됐고, 한국투자증권 역시 IB와 개인고객 대상 주식영업에서의 시너지를 높이기 위해 대우증권 인수에 상당한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미래에셋은 본입찰 직전까지 대우증권 인수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우증권이 매물로 나온 이후 미래에셋 관계자들은 줄곧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선 가격을 적어내면서까지 무리하게 인수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박현주 회장의 주도로 미래에셋 경영진들의 대우증권 인수작업이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미래에셋은 앞서 지난해 8월 인터넷전문은행 진출을 포기하면서 일찌감치 대우증권 인수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본입찰이 시행되기 한 달 전에는 9561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며 차분히 대우증권을 손에 넣기 위한 ‘실탄’을 확보했다.

이후 KB금융지주와 한국투자증권이 대우증권 인수에 필요한 ‘적정 가격대’를 고민하는 사이 미래에셋은 예상을 뛰어넘는 2조4000억원의 가격을 제시하며 결국 국내 증권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빅딜에서 최종 승자로 남게 된 것이다.

◆ '승부사' 박현주…월급 12만원의 샐러리맨에서 국내 최대 증권사의 CEO로

미래에셋이 대우증권의 새 주인으로 결정된 후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박현주였기 때문에 가능한 베팅이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그는 증권사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30년간 여러 차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진 적이 많았다.

박 회장은 그동안 수차례 강연과 저서 등을 통해 인생의 첫 번째 중요한 베팅은 증권업을 선택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동원증권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가 받은 월급은 성과급을 제외하고 12만원 수준이었다. 당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종합금융회사나 단자회사들의 월급이 80만원 안팎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같은 금융권 안에서도 상당히 박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박 회장은 한국 경제의 성장을 고려하면 결국 자본시장 역시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고, 자신의 능력으로 빠르게 성공할 수 있는 분야는 증권업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증권업계에 뛰어들었다. 승부수는 적중했다. 동원증권에서 그는 주식운용과 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불과 서른두 살의 나이에 최연소 지점장 타이틀을 달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임원이 됐다.

베팅은 멈추지 않았다. 박 회장은 보장된 성공가도를 포기하고 1997년 돌연 창업을 선언하며 미래에셋벤처캐피탈을 만들어 독립했다. 이어서 미래에셋투자자문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증권 등을 잇따라 설립해 일찌감치 금융그룹의 밑그림을 완성했다.

당시 예금이나 적금으로 돈을 모아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금융시장에서 박 회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박현주 1호'를 출시해 뮤추얼 펀드 열풍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해외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대부분의 국내 금융 회사들이 해외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달리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3년 국내 자산 운용업계 최초로 홍콩에 해외 현지 법인을 설립했고, 인도와 영국, 미국, 브라질, 대만 등에도 잇따라 현지 법인을 세웠다.

박 회장의 적극적인 해외 투자는 미래에셋이 설립한 지 약 10년 만에 국내에서 손꼽히는 금융사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2000년대 중반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해외 펀드들도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고, 많은 투자자들이 앞다퉈 미래에셋으로 몰린 것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미래에셋인디펜던스’ 주식형 펀드와 ‘미래에셋디스커버리’ 주식형 펀드 등 히트상품을 잇따라 출시하며 국내 펀드시장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운용사로 성장했다. 2005년에는 미래에셋생명을 설립하고, 사모펀드(PEF)를 통해 미국의 골프용품 제조사 타이틀리스트를 인수하는 등 금융그룹 전체의 규모도 계속 확장됐다.

◆ 펀드 수익률 부진·대우증권과의 DNA 통합…쌓여가는 과제도

그러나 박 회장의 과감한 승부수가 언제나 성공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설립 초기부터 별다른 어려움 없이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던 박 회장과 미래에셋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주식이나 채권 등 자산의 제약 없이 세계 여러 나라에 분산 투자한다는 전략으로 지난 2007년 출시돼 수조 원의 투자금이 몰렸던 ‘인사이트 펀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큰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주요 투자 대상이었던 중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인사이트 펀드는 출시 1년 만에 수익률이 ‘반토막’이 났고, 투자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비난이 뒤따랐다. 지금은 원금을 거의 회복했지만 박 회장은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도 했다

대우증권 인수 이후 증권사의 규모를 키우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금융그룹 전체로 봤을 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미래에셋그룹의 주력이었던 자산운용의 경우 수년간 코스피지수가 2000선에서 옆걸음하는 사이 국내 펀드시장이 침체를 겪기 시작하면서 최근 성장세가 꺾이고 있다.

통합 미래에셋대우가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미래에셋과 대우증권 직원들간의 ‘DNA 통합’에 성공해야 하는 점도 숙제로 남아 있다. 박 회장은 대우증권 인수 이후 그룹 전체 임원들의 골프 모임을 개최하는 등 대우 임직원들을 끌어안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대우증권 노조와 직원들은 미래에셋의 통합 작업이 일방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미래에셋대우 직원 1200여명은 미래에셋 계열사들이 입주한 서울 중구 수하동 센터원 빌딩 앞에서 “직원들의 실질적인 고용 보장을 위해 그룹이 노조와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협상창구를 마련하라”고 요구하며 약 2시간 동안 집회를 하기도 했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래에셋대우가 의도했던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두 회사의 진정한 DNA 통합이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한다”며 “박 회장과 미래에셋이 강한 공채 문화를 가진 대우증권 직원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 미래에셋의 색채를 입힐지를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