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의 법칙'은 종말을 맞았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제시한 이론으로 반도체 집적도는 1년 6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것이다. 한정된 면적에 트랜지스터를 많이 담으면(집적도를 높이면) 성능 뿐 아니라 수익성도 좋아진다는 믿음은 깨지지 않았다. 반도체 업체들이 무어의 법칙을 정설로 받아들이며 죽기살자식으로 집적도를 높여온 배경이다. 선두 자리에는 인텔과 삼성전자가 있었다. 그러나 인텔이 무어의 법칙 폐기를 선언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은 대전환기를 맞았다.

그동안 반도체 시장에서 무조건 최고 성능의 제품이 살아남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저성능에서 고성능까지 다양한 수요처가 생겼다. 사물인터넷(IoT), 스마트카, 웨어러블, 드론 등의 등장으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는 시스템 반도체가 그 예다. 이들 기기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비롯해 카메라이미지센서(CIS), 통신칩, 근거리무선통신(NFC)칩, 위성항법장치(GPS)칩, 전력관리칩 등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들이 들어있다.

조선, 해운, 건설 등 한국의 전통 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약 20년간 미국·유럽·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업계와 처절한 '치킨게임'(죽기살기식 경쟁)을 벌여 살아남은 결과다. D램 등 반도체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수익성은 나빠졌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입지는 굳건하다.

그러나 반도체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 반도체에 안주해선 안된다”고 경고한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다양한 수요처가 발생하면서 급성장 중인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시장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중국이다. 거대 자본과 시장을 앞세운 중국의 반도체 굴기(우뚝 섬)에 대비하기 위해선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의 균형적인 발전이 필요하다. 또다른 이유는 전세계 반도체 시장의 75%를 차지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 박재근 한양대 교수,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연구원,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한국의 시스템 반도체산업은 반도체 후발주자인 중국에도 뒤처져있다. 중국이 팹리스(반도체 전문설계 회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메모리에 편중된 산업과 특정 대기업에 종속된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를 비롯해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등 전문가들로부터 대응 방안을 들어봤다.

우선 정부가 반도체 설계 인력 부족을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설계인력이 중요한데, 인력이 많이 부족하고 벤처기업 육성도 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이 과감한 M&A에 나서야 하고 팹리스 지원을 통한 생태계 조성에도 한몫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 등 대기업은 3박자(자체 기술, M&A, 고급 인력)가 맞아야 중국의 추격을 막을 수 있다”며 “대기업은 중소 팹리스의 소량 위탁 생산을 받아주고, 기술 지원도 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이와 잇몸 역할을 하는 팹리스와 파운드리 육성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칭펀드'와 같은 정부의 투자 지원을 비롯해 무상 기술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① 반도체의 수요처가 다양해지면서 시스템 반도체가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의 경쟁력을 평가해 달라.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은 전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액의 25% 정도를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에 국한돼 있는 게 현실이다. 나머지 75%인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동부하이텍이 전력반도체 등의 아날로그 반도체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일부 분야를 제외하곤 글로벌 업체들에 비해 상당히 뒤처져있는 상황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한국의 반도체는 제조·설계 두 분야 중 제조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장 앞선 양산 공정인 14나노 제조 기술을 대만, 미국과 함께 보유한 국가다. 그러나 설계 기술은 미국에 비해 뒤처진다.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라인의 직원이 생산에 필요한 설계회로도 기판의 이상 유무를 살펴보고 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AP 제조 공정 기술에선 삼성전자가 최고 수준이다. 대만의 TSMC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현재는 살짝 앞서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는 제품 종류가 너무 많다. 그 중 하나인 AP 쪽은 잘하고 있다. 세계 1~2위 수준이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다른 제품군은 한국에서 하지 않는 것이 많아 전반적인 수준을 논하긴 어렵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메모리보다는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이 확실히 떨어진다. 최근 들어서는 디스플레이 드라이브 구동칩을 만드는 등 과거보다 많이 개선됐으나, 개선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다. 중국, 대만이 잘하는 것에 비하면 부족하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설계 인력이 중요한데,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 벤처기업 육성도 잘 안 되고 있다.

②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가 취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이 세계 1위까지 오르게 된 것은 정부 주도로 삼성 등 대기업 중심의 메모리반도체 육성 정책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메모리반도체는 소품종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경쟁력 강화가 핵심인데 반해, 다품종 소량생산이 주를 이루는 비메모리반도체는 제조경쟁력보다 회로설계능력이 더 중요한 분야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비메모리반도체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가 활성화돼야 하고 대학에서는 회로 설계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정부 사업 중 '시스템 2010'이라는 게 있었다. 그 사업을 통해서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하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좋아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시스템 2015 사업도 진행했지만( 2011~2015) 생태계가 많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정부가 시드머니(초기 자본)를 제공하고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 반도체 장비회사들이 비즈니스를 확장하는 식으로 생태계를 개선하려는 노력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정부가 지원해 줬기 때문에 업체들의 정부 의존성이 커져서 실패했다고 본다. 업체들도 물론 노력을 했지만, 비즈니스를 성공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정부 주도로 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본다.

민간 주도의 노력도 필요하다. 대기업은 팹리스 회사들이 많이 생기면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할 것이다. 민간 주도로 하려면 벤처캐피털 등 투자자들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 실력 있는 팹리스는 투자를 받아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벤처캐피털 규모가 많이 커져 환경이 좋아진 편이다. 벤처캐피털에 어필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팹리스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팹리스들의 제품을 보면 스마트폰 부품들이 많다. 구동 드라이브 회로, 전력을 제어하는 시스템 반도체(pmic) 등이 있다. 떠오르는 다양한 사물인터넷(Iot) 분야에도 도전해야 한다. 혈압이나 당뇨를 측정하는 헬스케어 센서라든지, 자동차 등에 필요한 센서들을 만들 수 있다고 알리고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팹리스가 많아져야 한다. 현재 한국에는 200개 정도의 팹리스가 있다. 중국의 600개에 비하면 부족한 숫자다. 500개 이상은 있어야 한다. 미국도 500개 된다. 미국의 경우, 개별 회사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벤처 기업이 많아지려면 토양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코스닥도 그런 역할을 많이 못하고 있다. 1999년에는 벤처기업육성책 같은 게 나왔다. 생태계는 정책 문제 뿐아니라 국가적인 문제, 국민성과도 상관 관계가 크다. 한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대기업을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반면 대만은 중소기업 위주로 산업이 구성됐다. 중소 팹리스 위주로 돌아가야 시스템 반도체가 발전할 수 있다. 옛날처럼 똘똘한 중소기업이 많이 나오는 생태계가 되어야 한다.

③ 정부의 역할은 어떤 게 있을까.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1980~1990년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오늘날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가 되는 바탕이 되었듯이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도 한국이 세계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특히 다품종 소량생산인 시스템반도체 산업 특성상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에 대한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또 삼성이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에 안주하지 않고, AP 등 시스템반도체 시장에 도전했듯이, SK하이닉스 등 다른 반도체 관련 대기업도 전기자동차, IoT 등 확대되는 신규 반도체 시장을 타깃으로 새로운 투자나 M&A에 나서야 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정부와 대기업의 역할이 각각 있다. 정부는 벤처캐피털에 매칭펀드(정부가 같은 금액을 투자하는 것)를 많이 제공해 벤처캐피털이 팹리스에 투자할 수 있게 유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팹리스 창업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대기업은 팹리스의 소량 위탁 생산을 받아주고, 기술 지원도 해줘야 한다. 팹리스들이 반도체협회에 요청하면 대기업이 무상으로 기술을 지원하는 식이다. 팹리스는 설계만 하는 회사다. 팹리스가 좋은 제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이들에 부족한 소프트웨어나 소자 공정 기술 지원이 필요하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팹리스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시장을 창출하는 등 창조적인 일을 한다. IoT, 스마트카, 웨어러블, 드론 등 새로운 시장을 여는데, 퀄컴, 인텔 등 팹리스들의 역할이 컸다. 대형 팹리스가 좋은 아이템을 내놓고 시장을 키우면, 중소 팹리스들의 영역이 생긴다. 중소 팹리스들이 전력 반도체라든지, 센서 등 세부 부품 설계를 맡는다.

중소 팹리스가 설계한 제품을 완성도 있게 제조해 줄 대기업이 필요하다. 최첨단 제조시설을 갖고 있는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는 팹리스를 늘릴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인재 육성과 창업을 잘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동부하이텍이 생산하고 있는 이미지센서 칩의 모습

④ 한국 반도체 산업이 무어의 법칙 이후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한태희 성균관대학교 반도체시스템 공학과 교수: 업계, 학계에서는 트랜지스터를 대체할 수 있는 신소자(나노 와이어 등)를 개발하고 있다. 신소자들이 성공적으로 개발되면 앞으로 10년, 20년간 무어의 법칙 처럼 빠른 진보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지금 무어의 법칙이 끝났다고 하는 건, 신소재들이 5년 내 트랜지스터를 대체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신소자 개발이 실현되는 시점까지 5년~10년 정도는 반도체 성능 향상이 정체기에 접어들 것이다. 업계 전반적으로는 반도체에 의한 성능 향상이 벽에 부딪힌 만큼 소프트웨어를 통한 성능 향상을 노릴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은 물질의 결정 특성을 이용한 'P램(위상변화 메모리)'과 물질의 저항 변화를 이용하는 R램, 자성(磁性)을 응용한 M램 등 차세대 기술에 대응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소자 제품의 개발이 어느정도 진척됐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기업간 기술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보안이 철저하다. 지난해 인텔이 3D크로스 포인트 칩을 개발한다 했는데, 아직 정확한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P램의 일종일 것으로 예측한다.

반도체 집적도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만큼 P램, M램 등이 조만간 상용화되는 시나리오로 봐야 하는데, 올해 하반기쯤에 가면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업들의 발표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관계자: 전망은 모른다가 정답이다. 여러 기술이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3차원 반도체도 1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이다. 회로선 폭을 계속 얇게 만들다 보면 결국 회로를 위로 겹치도록 쌓을 것이라는 예상이 10년 전에 나왔다.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삼성, 인텔, IBM도 확신하지 못한다. 투자하려면 조 단위인데,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전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IoT의 기본은 저전력이다. 성능을 높이려면 전력이 더 든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⑤ 한국 반도체 산업의 5년 후를 전망한다면.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중국이 맹추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1~2위는 유지하겠지만 지금처럼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 정도로 이익을 내려면 기술 격차를 많이 벌려야 한다. 스스로 기술 개발도 해야 하고 M&A도 과감하게 해야 한다. 고급인력 양성을 반드시 해야 한다. 3박자(기술, M&A, 고급 인력)가 맞아야 추격을 막을 수 있다.

시스템 반도체는 AP 사업의 경우 여전히 공정 경쟁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유지할 듯하다. 디지털 카메라 속에서 필름 역할을 하는 반도체인 이미지센서는 소니에게 뒤지고 있지만 기술 추격을 5년 뒤에는 하지 않을까 싶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동부하이텍 등 파운드리 사업 규모가 지금보다는 커질 것이다. 5년 뒤 파운드리 쪽에서 다룰 수 있는 제품들이 많아져야 한다.

삼성과 하이닉스의 사업 모델이 바뀌어야 한다. 대량 생산 위주에서 소량 생산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 양산력으로 승부를 보는 D램 등 대량생산 제품군의 경우 가격을 낮추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소비자 맞춤형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쟁력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어려운 질문이다. 중국이 위협요인이겠지만 5년 후인 2020년에도 한국의 메모리반도체는 여전히 세계 1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삼성의 파운드리 사업도 업계 상위권으로 올라설 것으로 보이며, 전기자동차 등 신규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도 동부하이텍 등 많은 한국업체가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기대한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굉장히 도전적인 상황이다. 중국이 맹렬히 추격 중이다. 중국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전세계 IT 기기의 60%가량이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추월당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