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정오 무렵 경남 창원시 진해구 STX 진해조선소. 날씨는 화창했지만 공기의 밀도는 묵직했다. 기업으로서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돌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다.

점심 식사 때가 되면서 일부 직원들이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낯빛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모두들 법정관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직원이 동료에게 "회사에서 잘리게 되느냐"고 묻자 "쌍용차처럼 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직원은 "경영정상화가 될 때까지 버틸 수도 있다"고 했다.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기자에게 "상황이 어찌 될 것 같으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우리 딸아이가 올해 여덟 살인데, 어떻게 10년만 더 일할 수 없겠느냐"고 하소연했다.

1967년 동양조선공업으로 출발해 2001년 STX그룹이 인수한 STX조선해양은 2008년 수주 잔량 기준 세계 4위 조선소까지 올랐다. 하지만 불과 8년 만에 법정관리에 직면했다.

"채권단 4조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STX 조선소 직원들 사이에는 이날 하루 종일 책임론이 거세게 일었다. 비난의 화살은 2013년 8월 자율협약 이후 사실상 경영을 이끌어 온 채권단에 쏠렸다. 25년 차 기술직 직원은 "채권단이 쏟아부은 4조원 넘는 돈을 우리는 구경도 못 했다"며 "대부분 저가(低價) 수주로 인한 손실액, 납기 지연에 따른 보상비용, 회사채 상환비용 등으로 다 빠져나갔고 정작 제조 생산성을 높이거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쓰인 돈은 거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기적인 비전 없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는 것이다.

25일 사실상 법정관리 신청 결정이 난 ‘STX조선해양’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조선소. 외국인 근로자들이 퇴근하기 위해 회사 밖으로 나가고 있다.

유조선 사업장에서 일한다는 또 다른 직원은 "채권단이 회계 장부나 보면서 회의를 한 결과가 이 꼴"이라며 "정말 회사를 살리려고 했다면 미래 비전에 맞는 명확한 목표와 시점을 정해놓고 실효성 있는 계획을 추진했어야 했다"고 성토했다.

그동안 채권단이 STX조선해양에 쏟아부은 돈은 4조5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찔끔찔끔 지원이었다. 2013년 4월에 6000억원, 두 달 뒤 2500억원의 운영자금을 주는 식이었다. 채권단의 경영 전망도 번번이 빗나갔다. 작년 9월에 4000억원을 지원하면서 "당분간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고작 8개월 만에 부도 위기가 닥쳤다. 일각에서는 "처음부터 정확한 진단을 해서 빚 갚는 것만 할 게 아니라 조선소가 살아날 수 있도록 과감한 지원을 했더라면 4조원을 안 들이고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어떻게 살릴지 청사진이 없는 상태에서 급한 불만 끄는 데 급급해 결국 돈은 돈대로 쏟아붓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STX조선의 채무는 약 5조9000억원에 달한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STX진해조선소의 전경. STX조선해양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25일 채권단 회의를 연 뒤 “유동성 부족이 심해져 법정 관리 신청이 불가피한 상태”라고 밝혔다.

전직 경영진에 대한 불만도 쏟아졌다. STX조선에서만 20년 일했다는 A씨는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던 강덕수 전 STX 회장의 고집이 재무 구조 악화를 불렀다"고 말했다. 강 전 회장은 2007년 수주량을 충분히 소화하기 힘든 협소한 부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중국 다롄(大連)에 28억달러(약 3조3400억원)를 쏟아부어 조선소를 지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A씨는 "다롄은 선박 건조에 적합한 기후가 아니어서 경영진부터 현장 직원들까지 모두 '다롄으로 가면 망한다'고 알고 있었는데도, 강 전 회장이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노조의 때늦은 후회

이날 오전 11시 STX조선 경영진과 노동조합 지도부가 만났다. 1시간여 회의를 마친 뒤 노조는 "회사를 살리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며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사실상 회사 측에 감원을 포함한 상당 부분의 권한을 이양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사측 관계자는 "진작부터 경영진과 같은 배를 탔다는 생각으로 협조했다면 사정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자금난으로 치닫던 지난 3월 노조는 회사를 고용노동부에 고발했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지급하던 자녀 학자금, 의료비 등 복지 혜택을 경영난을 이유로 중단하자 "동의한 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STX조선 노조는 강성 노조의 대명사였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인데다, 전신(前身)인 대동조선 시절 임금 인상을 위해 수차례 집단 파업을 벌였다. STX조선은 중형 조선소이지만 1인당 임금이 업계 최고 수준인 7600만원이다.

이날 조선소 전체는 비상사태 그 자체였다. 오전 9시쯤 경영진의 비상대책 회의가 열렸고, 사내 협력사 대표회의도 잇따라 열렸다. 조선소는 정상 가동됐다. STX는 현재 수주잔량이 55척이다. 내년 말 정도까지 버틸 수 있는 일감이다. 진해조선소 3개 독(dock)과 인근 고성조선소 1개 독은 현재 건조 중인 선박이 들어차 있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자율협약에 돌입한 2013년 이후 협력업체 20여 개가 도산했다. 업계 관계자는 "협력업체들의 줄도산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현재 STX조선 정규직만 2100여명,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9000여명이 일하고 있다.

대우조선도 STX 전철 밟나?

STX 법정관리행(行)의 양대(兩大) 원인은 무리한 저가(低價) 수주에다 기업 부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권단의 무능이다. STX조선해양이 자율협약에 들어간 직후인 2013년 5월.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으로 한 외국 대사가 찾아왔다. 대사는 "우리나라 정유업체에서 STX조선해양에 발주한 탱커선 12척을 예정대로 2015년까지 인도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산은이 부랴부랴 계약서를 검토해보니 어처구니없는 계약이었다. 7700억원에 수주했지만, 계약대로 탱커선을 만들어 인도할 경우 2800억원을 손해 보게 돼 있었다. 수주를 취소하고 위약금 1000억원을 물어주는 것이 나았다. 산은 관계자는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실을 끼칠 수 있는 이런 계약이 남발돼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은 등 채권단은 자율협약을 수용할 당시 STX의 이런 암덩어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승인했다.

STX조선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날 현장에서 만난 부장급 직원은 "부실덩어리를 과감히 도려내지 못하는 느슨한 구조조정을 하면 대우조선해양도 STX조선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자율협약은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적용하는 것인데 STX조선 상황은 일시적 문제가 아니었다"면서 "STX조선에 비해 휠씬 덩치가 큰 대우조선은 더 정밀한 진단과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법정관리 가면 어떻게 되나

법정관리로 가면 두 갈래 길이 있다. 법정관리 신청을 법원이 수용하면 채무탕감 등을 통한 회생 절차를 밟게 되고, 법원이 거부하면 곧바로 청산된다. 채권단은 이날 채권단협의회를 마친 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법원과 협의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행해 영업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법원이 청산을 결정하면 어쩔 수 없다.

업계에서는 지금과 같은 수주 절벽 상황에서 법정관리에 돌입하더라도 회사가 살아나기 쉽지 않다고 본다. 배를 만들수록 적자를 보는 저가 수주 물량이 많아 글로벌 경기가 획기적으로 살아나지 않는 한 경쟁력 회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수주해 건조 중인 선박은 52척인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계약을 취소할 가능성이 높다. 위약금 등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STX조선의 법정관리로 국내 은행이 보게 될 추가 손실은 2조원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