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신종 플루)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를 강타했다. 세계보건기구는 신종 플루로 전세계 사망자수가 1만 8630명이라고 공식 집계했다. 대유행처럼 번진 신종 플루를 잦아들게 만든 것은 바로 '타미플루'다.

타미플루를 처음 개발한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는 타미플루만으로 명성을 얻으며 단숨에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발돋움했다. 길리어드는 올해 1분기에만 순이익 35억 7000만 달러를 올리며 전세계 제약사 중 가장 높은 순이익률을 달성했다.

길리어드의 경영 철학은 '의약품이 아니라 과학을 파는 회사'다. 지난해 8조원 규모의 신약 후보물질 기술 수출 신화를 썼던 한미약품도 가장 닮고 싶은 제약사로 주저없이 길리어드를 꼽는다.

과학을 파는 회사 길리어드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타미플루의 첫 출발점은 '화합물'이다. 화합물은 2개 이상의 다른 원소들이 일정한 비율로 구성된 것이다. 새로운 화합물 개발은 타미플루 같은 신약 연구의 시발점이 된다.

탄소화합물 그래픽

최근 제약 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주목받으면서 기초과학의 산물인 화합물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더많은 화합물을 확보할수록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화이자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다국적 제약사들은 200만~300만 개의 화합물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동물윤리 문제로 쥐 등 포유동물 대신 화합물을 테스트할 수 있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 대박 신약의 '씨앗' 화합물...황금알 낳는 현대판 연금술

지난 12일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한국화학연구원 내 '한국화합물은행'에서는 실험 가운을 걸친 연구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소들과 씨름하며 새로운 화합물을 연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곳에는 약 40만 개의 화합물이 영하 6도 환경을 유지하는 설비에 보관돼 있다. 40만 개의 화합물 중 10만 개는 국내 연구자가 개발했고 나머지 30만 개는 해외에서 사들인 것이다.

영하 6도의 저온으로 유지되는 한국화합물은행에 보관 중인 화합물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기존 화합물이나 간단한 화합물에 다른 원소를 붙이기도 하고 원소를 떼어내는 과정을 반복해 새로운 특성이 있는 화합물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원소를 떼어내거나 합성하는 최적의 조건을 찾는 것이 연구자들의 몫이다. 열을 가하기도 하고, 때로는 촉매 반응을 유도하기도 한다. 비이커와 가열기구, 측정기기, 실험시험지 등 각종 화학실험 기자재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현대판 '연금술'인 셈이다.

이현규 한국화합물은행 센터장은 "박사급 인력이 1년에 만들 수 있는 새로운 화합물은 평균 약 100개 정도"라며 "아직 어디에 활용될지도 모르는 미지의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합물은 대부분 신약 개발에 활용되는데, 이를 '생리 활성 화합물'이라고 부른다. 생리 활성 화합물은 몸에 들어가 효소와 상호작용을 하며 생리 현상을 조절한다. 예를 들어 당뇨 환자들은 혈당을 조절하는 단백질인 인슐린에 문제가 있어 혈당이 높아진다. 이 때 인슐린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화합물을 개발하면 이 화합물이 바로 당뇨 치료제가 되는 것이다.

◆ 1만 개의 화합물에서 가까스로 1개의 신약 나와...바늘 구멍을 뚫어라

신약 1개를 개발하려면 가장 먼저 수만 개의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서 테스트해야 한다. 여기에선 새롭게 합성된 화합물의 효능을 단시간 내에 대량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동시대량효능검색법(HTS, High Through-put Screening)'이 활용된다.

수만 개의 화합물 구조와 효능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동시대량효능검색(HTS) 장비.

HTS를 거친 화합물 중 목표로 하는 특정 질환 치료에 효능이 좋은 물질을 추려낸다. 이를 유효물질이라고 하는데, 이 유효물질을 토대로 활성과 물성, 독성 기준에 부합하는 새로운 화합물을 만든다. 활성은 화합물의 활동성을, 물성은 화합물이 물에 녹는 성질이다. 독성은 부작용을 일컫는데, 활성과 물성이 없거나 독성이 있는 화합물은 유효물질에서 제외된다.

이현규 센터장은 "활성과 물성, 독성 테스트를 통과한 화합물이 유효물질이며 유효물질을 토대로 신약후보물질이 도출된다"며 "평균적으로 250개의 신약후보물질 중 단 1개만이 임상 1상 시험에 돌입할 수 있을 정도로 극악의 확률"이라고 말했다.

2000년 3월 설립한 한국화합물은행은 약 40만 개의 화합물을 국내 연구자, 연구기관, 제약회사에 제공하고 있다. 2008년 국가연구성과물 관리 유통 전담기관으로 선정된 한국화합물은행은 개별 화합물의 효능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외부기관이 확인한 특정 화합물의 효능 보고서를 받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국내외 연구기관에 제공해 연구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다양한 실험장비를 이용해 화합물의 특성을 테스트하고 있다.

이현규 센터장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면 외부 연구자가 똑같은 화합물의 효능을 중복해서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화합물은행이 보유한 화합물을 활용하겠다는 국내외 제약사들의 문의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 신약후보물질 효능 테스트하는 동물실험 대체 연구도 활발

화합물 테스트를 통해 신약후보물질이 도출되면 쥐 등 동물에 주입해 효능을 확인하는 전임상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예를 들어 비만치료제 후보물질을 실험할 경우 쥐에게 음식을 많이 먹여 비만 상태로 만든 뒤 치료제를 투여해 변화를 관찰한다.

제브라피쉬

화학연구원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브라피쉬'를 신약 개발 및 바이오제품 개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프라피쉬 플랫폼 사업단'을 5월 초 출범시켰다. 제브라피쉬는 성체의 크기가 약 3~4cm 정도인 담수어로 인간 유전자 및 조직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새로운 물질의 유효성과 안전성, 약물성을 효과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동물윤리 지침이 강화되면서 포유동물이 아닌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 동물대체시험법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제브라피쉬를 사용하면 많은 수의 개체를 쉽게 확보할 수 있고 포유동물 실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사업단은 제브라피쉬를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도 포유동물 실험에 버금가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업단 총괄책임자인 배명애 화학연구원 박사는 "제브라피쉬를 활용한 초기 연구개발 단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신약 개발 경쟁력을 강화하고 동물윤리 문제도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동물 실험을 대체할 '인공장기 칩(Organ-on-a-chip)' 연구도 활발하다. 인간세포로 이뤄진 얇은 막과 혈액과 비슷한 액체로 손톱 정도 크기인 마이크로칩을 만드는 것이다. 소화기관의 소화 작용이나 폐의 호흡과 같은 작용을 하는 '인공장기 칩'이 이미 개발됐다.

이현규 센터장은 "인공장기 칩으로 화합물을 테스트할 방법이 많아지고 있다"며 "그러나 실제 생체를 대상으로 하는 테스트 결과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