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하는 이모(49)씨는 2014년에 집을 사면서 시중은행에 주택담보대출로 1억2000만원을 빌렸다. 이씨는 사업이 어려움을 겪어 지난해 9월부터 3개월 연속 이자를 연체했다. 이씨가 은행에 물어야 할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처음엔 연체한 이자에 대한 연체 가산금만 내면 됐지만, 연체가 셋째 달을 넘어가자 이자뿐 아니라 대출 원금에까지 연체 가산금이 붙었다. 평소에 매달 이자로 약 50만원씩(금리 연 5%) 내던 이씨는 연체가 이어지자 한 달에 연체 가산금으로만 70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씨는 얼마 후 150만원을 마련해 은행에 갚았지만, 연체 이자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다음 달 다시 추가로 연체 가산금이 70만원 정도 붙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금융 소비자 단체를 찾아가 구제를 요청했다.
가계부채가 나날이 불어 1200조원을 넘어선 가운데, 일단 연체를 하면 그 굴레를 도무지 벗어나기 힘들게 짜여져 있어 은행의 대출 관행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은행 대출을 3개월 이상 연체해 신용불량자(금융 채무 불이행자)가 된 사람은 110만명에 달한다.
◇금리는 '반 토막', 연체 금리는 '제자리'
은행 대출자들이 '연체 개미지옥'에 빠지는 과정은 이렇다. 대출을 연체하면 갚지 못한 이자에 대해 '연체 가산금리'(연이율 6~8%)가 붙는다. 연체에 대한 일종의 벌금이다. 1억2000만원을 빌려 한 달에 50만원 정도 이자를 내던 대출자라면 연체 첫 달에는 연체 가산금이 4600원 정도다. 큰 부담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연체 석 달째(신용대출은 두 달)에 넘어가면 연체 가산금리가 한 달에 70만원으로 껑충 불어난다. 이때부터는 은행이 밀린 이자 50만원이 아닌, 원금 1억2000만원에 대해 연체 가산금리를 매기기 시작한다. '원금 갚을 능력이 의심되니 곧 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대출자에게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일본·호주 등의 은행들이 연체 후 4개월 정도까지 기다렸다가 원금에 이자를 붙이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 은행들은 지나치게 야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체 가산금에 붙이는 이자율 역시 지나치게 높다. 연체 가산금리는 현재 연 6~8% 수준이다. 2009년에 비해 시중 금리는 반 토막 났는데, 연체 가산금리는 거의 제자리다. 한국과 기준금리가 비슷한 호주의 연체 가산금리(약 2%)보다 3~4배 높다. 이에 대해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에 따라 연체 가산금리를 깎아주는 등 연체자 구제 방법을 마련해두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도덕적 해이를 우려해 대부분 공개하지 않는다"며 "연체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우선 창구에서 상담을 받아 상환일을 다소 미루는 등 구제 방법이 있는지부터 알아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LG경제연구원 조영무 연구위원은 "연체 가산금리가 이자 상환을 미룬 데 대한 징벌적 성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은행 조달 금리가 내려간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너무 높은 수준"이라며 "이미 빚 갚기 어려운 상태인 연체자들의 부담을 줄여주려면 연체 가산금리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빚 갚을 땐 은행 맘대로 뒤에서부터 상환
연체자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족쇄는 빚 갚는 순서다. 앞서 이씨의 경우처럼, 연체자가 밀린 이자의 일부만 가져오면 은행들은 이자를 과거 것부터 제하지 않고, 종종 최근 것부터 제한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 발생한 이자가 거의 마지막까지 남아 '장기 연체자' 신세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금융소비자연맹 강형구 국장은 "이렇게 되면 빚을 한꺼번에 갚지 않는 한 '장기 연체자' 신세를 면하기가 매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은행이 대출자들에겐 잘 알려주지 않는 이런 불합리한 상환 순서 탓에 몇만원을 못 갚아 신용불량자가 되는 일도 발생한다. 시중은행에서 1억2000만원을 주택담보대출(금리 연 5%)로 빌린 이모씨는 이자 상환을 3개월 연체해 내야 할 돈이 271만원에 달하자〈표 참조〉 이 중 일부라도 상환하려고 150만원을 은행에 갚았다. 이씨가 상환한 돈 150만원은 마지막 달에 발생한 연체 가산금과 이자를 우선 갚고, 남은 30만원은 처음 발생한 이자 50만원 중 일부를 갚아 결국 이자를 20만원 덜 갚은 셈이 된다. 만약 마지막 달에 발생한 연체 가산금 70만원만 분리해서 먼저 내도록 하고 이자를 앞에서부터 갚는다면 첫 달 이자가 상환돼 대출 원금 전체에 이자가 붙는 조건이자 신용불량자로 추락할 위험이 있는, '연체 3개월'이란 족쇄가 풀릴 수 있다는 것이 금융소비자연맹의 설명이다.
미국에서는 장기 주택담보대출 연체자가 빚을 일부 갚았을 때 금융회사가 연체 가산금을 먼저 제한 다음 '처음 연체한 돈이 일부 남았다'며 계속 가산금리를 부과하는 행태를 '연체 피라미드(피라미드처럼 연체 가산금리가 계속 쌓여간다는 뜻)'라고 명시하고 연방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에 소비자 단체인 금융소비자연맹은 은행 대출약관에 명시된 대출 구조를 개선해달라는 내용으로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금융감독원에 '은행 여신거래 불공정한 약관 개정안'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