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저녁을 반대한다.'
누구나 '오늘 뭐 먹지'란 문제로 고민을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내놓는 외식 시장 앞에서 매번 같은 음식을 고르는 것만큼 고역인 일도 없다. 조금 더 감각적인 요리, 세계 미식(美食) 트렌드를 한 발 먼저 담은 요리를 경험하는 일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일상의 위로가 된다.
매번 비슷한 저녁 메뉴에 지친 한국인을 위해 세계적인 요리사들이 6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그랜드 스타 디너'에서 뭉쳤다. 이번 디너는 조선미디어그룹 TV조선이 주최한 서울 푸드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격인 행사다.
◆ 요리계 어벤저스, 부산 거쳐 서울에 집결…4시간 걸친 만찬 선보여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요리사들은 지난 2일 부산항 크루즈 페스티벌로 막을 올린 이후 3일 부산 웨스틴 조선호텔 갈라디너쇼, 4일 서울 워커힐 호텔·남산 N타워에선 포핸즈 디너(2명의 주방장이 협업해 꾸민 저녁 자리), 5일 잠수교 '피크닉 온 더 브리지'를 따로 치르고 6일에서야 한 자리에 모였다.
7살때부터 요리를 시작했다는 프랑스의 천재 주방장과 200년 전통의 일식 가이세키 레스토랑 '나카무라'의 수석 주방장, 화가 출신의 한식 대가, 이름조차 생소한 동유럽 국가 '그루지아(Georgia)'에서 온 미식 TV프로그램 호스트, 국제 초콜릿 어워드 금메달리스트 등 리스트가 화려하다. 이들이 미슐랭 가이드에서 딴 별을 모으면 총 18개. 가히 요리사계(系)의 '어벤저스'라 할 만하다.
세계 정상급 요리사들은 이날 디너에서 각자 한 가지씩 총 10가지 코스요리를 선보였다. 북유럽 식문화, 은근한 직화(live fire), 발효 음식 등 최신 다이닝 트렌드를 집약한 요리가 3시간 넘게 이어졌다. '똑같은 저녁'에 질렸을 미식 애호가들은 이 자리를 맛있게 달궜던 특별한 요리들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 '아시안 프렌치부터 북유럽 퀴진까지' 글로벌 미식 트렌드를 집약한 맛의 향연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25석 규모의 작은 아시안 프렌치 레스토랑 라스트랑스(L'Astrance). 그 흔한 인터넷 홈페이지조차 없는 이 레스토랑은 6개월 전 전화예약이 필수일 정도로 프랑스 현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오너셰프는 창의적인 아시안 프렌치 요리로 미슐랭 3스타를 거머쥔 파스칼 바르보(Pascal Barbot)다.
그는 7살 때부터 요리사를 꿈꾼 프랑스의 요리 천재다. 정해진 메뉴 없이 그날 신선한 재료로 부엌에 들어선 영감에 따라 즉흥적인 요리를 내놓는다. 프렌치 요리에 주로 쓰이는 크림, 버터 등 유제품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의 요리에선 일식·한식 등 아시아 요리의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날 바르보 주방장은 수제 훈연한 제주도 무태장어를 멸치 육수와 곁들여 냈다. 제주도에서 자란 무태장어는 일반 민물뱀장어보다 크기가 크고 식감이 쫄깃하다. 여기에 멸치 육수를 곁들이는 조합은 정식 프렌치 요리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다. 재료와 달리 조리는 프렌치 요리 방식을 고수했다. 순무과 양배추를 교배시킨 채소 '콜라비'를 무쌈처럼 얇게 썰어 그 안에 물 들인 생강을 라비올리(이탈리아식 만두)처럼 감쌌다. 은은한 멸치 육수 향이 얼핏보면 일식 일품 요리를 떠올리게 했다.
최근 세계 미식계에서 주목받는 북유럽의 '뉴 노르딕 퀴진(New Nordic cuisine)'도 빠지지 않았다. 북유럽은 겨울이 길어 여러 가지 식재료를 갖추기 힘들다. 그러나 스웨덴, 덴마크의 젊은 요리사들은 추운 환경을 이겨낸 강한 풍미의 다양한 허브,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다양한 베리(berry)류를 그들만의 염장과 훈연 기술로 조리해 냈다.
이날 현대적인 북유럽 요리를 선보인 마그너스 엑(Magnus Ek) 주방장은 자신이 나고 자란 스웨덴 북부 칼릭스강에서 얻은 송어 알, 인근 농가에서 얻은 신선한 송아지 고기를 사용해 북유럽의 특성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음식을 내놨다.
그가 내놓은 음식 이름은 '송아지 고기 타르타르와 칼릭스산 생선알, 치킨 에멀젼, 로바지(스웨덴산 허브)와 얼린 버터밀크'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육·해·공 식재료를 한 그릇에 조화롭게 담았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축산물로 신선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선보이는 북유럽 요리의 전형이다.
◆ 최고 주방장들 사로잡은 '발효 음식의 멋'
"이제 세계는 발효식품의 시대가 될 것이다. 제1의 맛은 소금, 제2의 맛은 양념, 제3의 맛은 발효의 맛이다. 세상은 서서히 발효의 시대로 옮겨 가고 있다."
미래 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해외 주방장들은 발효 음식에 대한 애정을 보여줬다. 동유럽 국가 그루지아에서 온 바크탕 데브다리아니(Vakhtang Devdariani) 주방장과 레반 코비아쉬빌리(Levan Kobiashvili)는 이날 디너를 시작하는 메뉴로 매실소스를 곁들인 비트를 선보였다. 비트는 무를 닮은 서양식 붉은 채소다. 빨간 비트의 겉면에 발효한 매실 소스를 흘러 내리게끔 뿌려 비트의 씁쓸한 맛을 매실의 깊은 단맛으로 정리했다.
한국인으로선 이날 저녁 자리에 유일하게 요리를 내놓은 이종국 주방장은 적절히 익은 봄김치를 내놨다. 봄 김치는 발효 식품이지만, 가을 배추로 담그는 김장 김치와는 다르다. 이날 맛본 김치는 봄갓으로 담궈 아삭아삭 씹히는 맛과 향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초봄이나 입맛 없는 여름에 산뜻한 맛으로 즐길 만했다.
이 요리를 선보인 이종국 주방장은 화가 출신의 한식 대가다. 2005년부터 서울 성북동에서 한식연구소인 '음식발전소'를 운영한다. 이곳은 50년 숙성 간장과 5년 발효한 전통 식초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 주방장은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식을 추억을 바탕으로 재해석해 음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자연에서 채집된 식재료와 전통 그릇, 여기에 예술적 상상을 더해 한 폭의 그림과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주방장들은 디너에 앞서 이 주방장의 음식발전소에서 한국 전통 발효 음식을 맛보며 50년간 이어 내려온 발효 음식 비법을 전수받았다.
◆ 프랑스·미국·그루지아産 와인과 찰떡 궁합
훌륭한 만찬에 와인이 빠질 수 없다. 이날 서빙된 와인은 모두 5종. 요리사들이 준비한 음식이 2~3종 나올 때마다 와인잔에는 새 와인이 찼다.
초반 비트 샐러드, 마리네이드 관자 요리에는 프랑스 론(Rhone)지역 유명 생산자 엠 샤푸티에(M. Chapoutier)의 '라 시부아즈(La Ciboise) 블랑'을 서빙했다. 이 와인은 론 지역 토속 포도인 마산느 품종을 절반 정도 사용해 입안에서 가볍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 샐러드나 자칫 기름진 느낌이 과할 수 있는 진한 해산물 요리에 잘 맞는다.
이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요리사 메튜 비아네이(Mathieu Viannay)와 바르보 순서에는 프랑스에서 떠오르는 와인 산지인 남부 지방 와인을 맞춤했다. 이날 나온 매종 루이 라투르 '그랑 아데슈 샤르도네(Grand Ardeche Chardonnay)'는 통나무통에서 단시간 숙성해 은은한 바닐라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바르보 주방장이 내놓은 무태장어 요리의 풍미를 한층 북돋아 주기에 적격이다.
고기 요리 순서가 되자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루지아산 전통 와인과 미국산 피노누아 품종 와인이 나왔다. 그루지아 전통 품종 '므츠바네(Mtsvane)'로 만든 와인 '모나스테리 퀘베리'는백포도주지만, 붉은 송아지 고기 요리에 꼭 맞는다. 일반 통나무통 대신 서양식 도자기 '암포라'에서 공기를 듬뿍 머금고 숙성돼 입안에서 느껴지는 구조감이 적포도주만큼 튼튼하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한 저녁 자리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날 정도로 장대했다. 행사 내내 자신의 주방이 아닌 곳에서 디너를 꾸리느라 분주했던 요리사들은 행사 말미 모두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올라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이들에게 '스타 요리사' 특유의 오만함은 보이지 않았다. 1년에 단 한 차례 선보이는 디너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뿌듯함만이 엿보였다. 전 세계를 한자리에서 맛봤다는 만족감이 입 안에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