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과 조선업 구조조정의 첫 단추를 끼우는 작업부터 정부와 한국은행이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구조조정 속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한은이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 두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에 자금을 지원해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지만, 한은은 선뜻 손을 맞잡지 않고 있다.

정부가 한은에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을 요청하는 것은 해운업과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만기 연장, 출자 전환 등의 방식으로 빚더미를 덜어줘야 하는데 두 은행의 체력이 떨어져 있어 이대로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속한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두 은행의 체력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한은이 수출입은행 자본 확충(지분 확대) 등 직접적인 지원에 나서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서 추진하는 기존 방식은 정치 일정상 9월 정기 국회 이후로 밀리게 될 가능성이 크고,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이라 실업 대책 등을 강하게 요구하는 야당에 발목이 잡혀 속도를 내기 힘들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한은은 정부의 요청을 절반만 들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1일 "한은이 그동안의 부정적 입장에서 다소 바뀌어 정부를 돕겠다고는 하는데, 정부가 요청하는 수출입은행 자본 확충은 거부하면서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한다"면서 "다른 방법은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은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말했다. '한은의 독립성'이라는 명분에 집착해 해운업과 조선업의 구조조정이 다급한데도, 정부가 제시한 지름길을 두고 둘러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양측은 감정 싸움의 조짐까지 보인다. 이날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한은은 어느 나라 중앙은행이냐.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은 마이너스(-) 금리까지 동원한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반면, 한은 고위 관계자는 "금융위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덮어놓고 돈만 내라고 한다. 한은 총재가 신문을 보고 금융위의 구조조정 정책을 알게 되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냐"고 금융위를 비난했다.

정부 "구조조정 속도 내게 도와달라"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언론사 경제부장 간담회에서 "지금은 한은이 한국 경제를 위해 나서줘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국책은행 자본 확충을 지원해 달라고 구체적인 주문을 했다. 수출입은행은 심각한 상황이다. 대출의 절반 이상이 해운업과 조선업에 몰려 있다. 은행의 건전성 지표인 BIS비율(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최근 9%대로 추락한 상태다. 시중은행의 BIS 평균 비율은 14%대에 달한다. 정부는 한은이 수출입은행 지원을 맡아주길 바라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한은이 산업은행 출자하려면 산은법 개정 등이 필요하지만, 수출입은행 지원은 그런 절차가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외환위기 당시 수출입은행에 자금을 지원해 현재도 13% 정도의 지분을 보유한 2대 주주이다. 따라서 2대 주주인 한은이 수출입은행의 지분을 늘리는 방식으로 지원해 달라는 것이 정부 요청이다.

수출입은행에 비하면 산업은행은 그나마 형편이 낫다. 산은은 자본 확충에 이용할 수 있는 특수한 채권(조건부자본증권)을 발행하는 방법 등으로 모자라는 부분을 채울 수 있다.

선별적 양적 완화로

구조조정에서 한국은행의 역할론이 불거진 것은 지난 4·13 총선 때 새누리당 강봉균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한국판 양적 완화'를 제안한 것이 단초가 됐다. 한국판 양적 완화란 한국은행이 산업금융채권과 주택담보부증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돈을 풀어 가계부채 문제와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이 반대하고 있어 추진하기 어렵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언론사 편집국장 간담회에서 '한국판 양적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다가 이틀 뒤인 지난달 28일 국무회의에서는 '선별적 양적 완화'란 표현으로 바꿔서 거론했다. 박 대통령은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은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이 펼친 무차별적 돈 풀기 식의 양적 완화가 아닌, 꼭 필요한 부분에 지원이 이뤄지는 선별적 양적 완화 방식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아예 '한국판 양적 완화'라는 단어 대신, 범위와 목표를 좁혀서 '구조조정을 위한 국책은행 자본 확충'이라고 표현한다. 임종룡 위원장은 "양적 완화는 돈을 풀어 유동성을 확대한다는 것인데,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국책은행의 건전성"이라며 "국책은행들이 구조조정을 할 수 있도록 건전성을 강화하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은 "정부 요청 100% 수용은 못 한다"

이 같은 요청에 대해 이주열 총재는 아직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한은 내부에서 "반대해야 한다"는 원칙론과 "한국 경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엇갈리면서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윤면식 한은 부총재보는 지난달 29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활용해 재정 역할을 대신하려면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은은 이 발언이 나온 직후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원론적인 언급이니 확대 해석을 삼가 달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정부 요청을 100% 외면하기는 힘든 상황에 놓인 한은이 현재 만지작거리는 카드는 일시차입금이다. 정부 요청 사항을 그대로 수용해 수출입은행 지분을 늘려서 자본 확충을 해주기는 어렵다는 입장은 여전하다. 대신 한은이 돈을 빌려주면 정부가 그 돈으로 국책은행을 도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추경과 마찬가지로 국회 승인이 필요해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대해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국채 발행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니 추경이나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이기 어렵다"면서 "수출입은행 지분을 늘려 자본을 확충해주는 방법은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만 통과하면 되니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인데도 한은은 자꾸 딴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