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호, 마크 워커.

"용선료(배를 빌려 쓰는 비용) 낮추는 협상은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회생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26일 정부 구조조정협의체 회의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해운업 구조조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용선료는 해운사들이 빌려 쓰고 있는 선박의 선주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돈이다. 해운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용선료 부담이 급격하게 높아져 경영 정상화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두 회사가 회생하려면 세 차례의 높은 파도를 넘어서야 한다. 첫 번째 파도가 용선료다. 두 번째는 사채권자들의 채무 감면과 유예, 세 번째는 채권단의 자금 지원이다. 정부 관계자는 "첫 번째 파도가 가장 높고 험하다. 첫 번째 파도를 넘는다면 두 번째, 세 번째 파도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룡 위원장은 "용선료 인하 협상이 불발된다면 원칙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법정관리를 피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현대상선은 지난 2월부터 영국 조디악, 그리스 다나오스 등 해외 선주(船主)들과 기존 계약을 변경하여 용선료를 낮추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용선료 부담 덜어내야 침몰 면한다

현대상선의 경우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컨테이너선과 벌크선(일반 화물선) 등 116척을 운용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83척을 빌려 쓴다. 지난해의 경우 해운동맹에 지불한 금액 등을 포함해 전체 용선료는 1조8793억원이 나갔는데, 이 가운데 해외 선주들에게 지불한 금액이 9000억원가량 된다. 지난해 매출(5조7685억원)의 16%에 육박한다. 현대상선을 비롯한 해운사들의 용선 계약 기간은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이다.

해운 경기가 호황이던 시절에 체결한 계약들 때문에 현재 시세보다 4~5배 많은 용선료를 지불하고 있다. 용선료 인하가 없다면 채권단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채권단이 지원하는 돈으로 매년 9000억원대의 용선료를 지급해 선주들의 지갑만 두둑하게 만들고, 현대상선은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다. 한진해운도 총 151척의 선박 가운데 91척이 임차 선박이어서 선주들에게 지불하는 용선료만 연간 1조1469억원에 달한다. 정부와 채권단이 기대하는 용선료 인하 폭은 30% 선이다. 현대상선은 매년 2700억원, 한진해운은 3400억원가량 지출을 줄일 수 있다. 이러면 회생의 발판을 만들 수 있다.

역전의 용사들이 '벼랑 끝 전략'으로 협상 진행

외환은행 헐값 매각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변양호 신드롬'의 주인공 변양호 전 보고펀드 대표, 외환 위기 당시 우리나라 외채협상단의 법률고문으로 활약했던 마크 워커 변호사가 협상에 관여하고 있다. 변 전 대표는 IMF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국제금융과장으로 워커 변호사와 함께 외채협상단을 이끌었다. 마크 워커는 월가 인맥을 소개해주며 부채관리 방안을 조언, 당시 250억달러에 달했던 단기외채 상환을 미루는 데 힘을 보탰다. 그 공으로 1998년 수교훈장 흥인장(2등급)을 받았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12월, 미국 밀스타인 법률사무소 소속인 마크 워커에게 SOS를 보냈다. 그는 산업은행을 상대로 한 채무 탕감 협상과 해외 선주를 상대로 한 용선료 인하 협상을 맡았다.

컨테이너선·벌크선 등 현대상선 각 사업부문 임원과 실무 직원 등 10명 안팎으로 구성된 협상단은 영국과 그리스 등지의 해외 선주사 22곳을 찾아다니며 용선료 인하 협상을 벌이고 있다. 협상단은 "용선료 인하가 없으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고 기존 용선 계약은 파기된다. 극심한 해운 불황이라 달리 배를 빌려줄 곳도 없지 않으냐"며 선주들을 설득하고 있다.

5월 중순이 협상 데드라인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선주들의 결정을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현대상선과 채권단이 최종 제안서와 함께 시한을 선주들에게 제시할 것이다. 그때까지 동의가 없으면 후속 조치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산은은 국내 대형 회계법인에 의뢰해 채권단·사채권자들이 채무 유예와 삭감, 출자전환 등으로 고통을 분담할 수준을 정해 최종 제안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일종의 경영 정상화 방안이다. 산은 관계자는 "'선주들도 이 정도 양보해주면 회사가 살아날 수 있어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설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