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뭘 해야 하는 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하고 나서 재선(再選)에 성공할 방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다.”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과거 룩셈부르크 총리 시절에 한 말이다.

융커 위원장의 말은 유로존의 위기 대응이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한탄이다. 위기를 막기 위한 근본 처방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캐나다의 폴 마틴 전(前) 총리도 “개혁의 부담은 현 정부가 짊어지고 선거에서 심판 받지만 개혁으로 인한 혜택은 선거 이후에 온다”고 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개혁과 구조조정에는 고통이 따른다. 성장률이 추락하고 실업자가 늘어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개혁의 비용은 즉각 치러야 하지만 개혁의 혜택은 서서히 나타난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구조개혁에 소극적이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최근 국내에서 조선업과 해운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 동안 구조조정의 운(韻)만 띄우고는 마냥 미적거리던 정부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워크아웃과 법정관리, 합병 등 다양한 방안이 거론되고 있고 구체적인 조치가 잇따를 예정이다. 보기 따라서는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선 더불어민주당의 역할이 컸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과잉시설이 있는 분야는 과감하게 털어내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며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한 게 계기가 됐다.

야당은 과거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부실기업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사태를 극단적으로 몰아갔다. 그래서 총선 직후엔 구조조정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김 대표의 발언은 야당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깨면서 정부에도 큰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지만 아직은 총론 수준의 합의에 머무르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detail)에 있다”는 말처럼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서로 틀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국내 ‘빅3’ 조선사 중 1~2곳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사들의 경영 악화가 심각하고, 조선업 전망이 극히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장 이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대출·회사채·지급보증 등을 통해 금융권이 물려 있는 금액이 21조원을 넘는다. 대우조선해양의 간판을 내리는 데 따른 손실이 금융권과 경제 전반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알 수 없다. 더욱이 대우조선해양 한 회사로 끝날 일도 아니다. 부실기업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려다 보니 그 부담이 너무 커졌다.

그렇다고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합병 같은 다른 대안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없다. 결국은 부실을 털어내기 위한 과감한 수술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 그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 그러고도 새 회사가 살아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해운업도 마찬가지다. 한국 조선업과 해운업의 살 길에 대해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여기다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지역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노조가 거세게 반발하면 정치권에서 다른 소리가 나올 우려가 크다. 여당도 야당도 다를 게 없다. 표(票) 앞에서는 언제라도 말을 바꾸고 표변할 수 있는 게 정치인들이다.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려면 정부와 정치권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어야 한다. 나중에 특혜 시비 등이 나오지 않도록 구조조정의 큰 틀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구조조정을 위한 재원 마련과 실업 등 구조조정의 충격 완화 대책도 중요하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고통 분담을 설득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도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 제한돼야 한다. 구조조정의 가장 큰 변수는 세계 경제의 변화다. 이른바 ‘뉴 노멀(New normal)’로 불리는 세계 경제의 새로운 현실과 4차 산업혁명을 비롯한 미래 전망이 그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국내 정치적 계산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따지고 간섭하면서 조건을 달면 상황이 꼬이고 잘못될 위험만 커진다.

구조조정은 시장에서 자율적이고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역대 정권이 “내 임기 중에는 안 된다”며 구조조정을 틀어 막고, 그래서 10~20년마다 한 번씩 온 나라가 홍역을 치르는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 구조조정 시스템이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자신들의 역할에 족쇄를 채우는 게 이번에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마지막 중요한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