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두산인프라코어 연구개발(R&D) 부서에 근무하던 연구원 A씨는 '희망퇴직' 형식으로 퇴사했다. A씨는 "5년 전 연구 인력의 초봉을 다른 사무직보다 최대 수백만원 더 보장하고 R&D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회사 말을 믿고 입사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두산인프라코어는 쑤저우(蘇州) 산업단지에 새 공장을 건설하며 중국 굴착기 시장에서 일본 '고마쓰'에 이어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러나 2014년 두산인프라코어가 싼이(三一)중공업 등 중국 업체의 공세에 밀려 점유율이 반 토막 나자 회사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난해 사원·대리급을 포함해 사무직 직원 3000명 전원을 상대로 퇴직 신청을 받았다. 긴축 경영의 칼바람이 가장 매섭게 몰아친 곳은 연구개발 부문이었다. 2012년 만들어졌던 기술본부가 3년 만에 해체됐고, 전체 퇴직 인력(1659명) 가운데 565명(약 34%)이 연구개발 인력이었다.
◇어려울 땐 R&D부터 줄이는 한국 기업
우리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할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는 데에는 위기 때 가장 먼저 R&D 분야를 축소하는 경영 관행에도 큰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 경영이 조금만 나빠져도 우수한 R&D 인력이 회사를 떠나고 신기술 개발이 단절된다는 것이다. 정작 호황기가 와도 신기술이 없어 다시 실적 부진에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도 R&D 부문은 가장 마지막에 손대는 글로벌 기업들과 대비된다. 미국의 모바일용 반도체 업체인 퀄컴은 실적과 상관없이 매년 매출액의 20%를 연구개발에 꾸준히 투자한다. 다국적 제조업체 GE도 2008년 금융위기 때 연간 10억달러(1조1300억원)에 달하는 인재 교육 예산은 한 푼도 손대지 않았다.
위기 상황 시 연구개발 조직을 가장 먼저 축소하는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3년 해체된 STX그룹은 2011년 5월 그룹 내 전략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싱크탱크'로 'STX미래연구원'을 만들었지만,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설립 1년 만인 2012년 6월 이 조직을 가장 먼저 없앴다. 삼성도 작년 실적이 부진하자 그룹 재편을 진행하면서 장기 연구를 하는 '삼성종합기술원'의 기능을 대폭 축소했고 '디지털미디어커뮤니케이션(DMC)연구소'도 2000여 명의 인력 중 3분의 2 이상을 일선 사업부서로 배치하며 사실상 정리했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5년간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연구개발을 진행한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이 실적을 내지 못하자 지난해 사업을 접었고, 연구개발 인력은 다른 부서로 옮겼다.
◇"연구개발을 비용 낭비로 보는 시각 많아"
위기 때 연구 인력이 구조조정 1순위가 되는 이유는 우리 기업들이 장기 연구개발을 단순 코스트로 보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재계 순위 20위권의 한 대기업 계열사 연구소장은 "R&D는 돈만 까먹는다는 생각을 가진 기업 오너가 많다"고 했고, 한 공기업 연구본부 연구원은 "'월급은 줄 테니 쓸데없는 연구 프로젝트는 벌이지 말라'는 소리도 듣는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술이 결실을 보기 직전 연구개발을 포기하는 경우도 나온다. 한화케미칼은 2008년 서울대 현택환 교수팀이 개발한 '균일한 나노 입자 대량생산기술'을 43억원에 이전받았다. 의료용 첨단 MRI(자기공명영상) 조영제를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 균일한 나노 입자를 한 번에 1㎏ 이상 생산할 수 있는 양산 설비 구축에 성공했고, 동물실험까지 진행했지만 지난해 8월 돌연 기술개발을 중단했다. 한화케미칼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술이긴 하지만 임상실험에 시간이 오래 걸려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위기라고 연구개발을 중단하는 것은 회생(回生)의 씨앗에 제초제를 뿌리는 격"이라며 "우리 기업엔 기술 개발을 통해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선구자의 DNA'가 부족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