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얄캐리비안의 크루즈 여객선 퀀텀오브더씨즈호

지난 9일 부산항의 짙은 새벽 안개를 뚫고 16만7000톤급 초대형 크루즈 여객선 퀀텀오브더씨즈호가 부산에 정박했다. 퀀텀오브더씨즈호의 높이는 62.5미터, 길이가 348미터다. 여의도 63빌딩(높이 250미터) 보다 훨씬 크고,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높이 381미터) 보다 조금 작다.

거대한 크루즈선이 항구에 정박하자 울긋불긋한 복장의 외국인 관광객 4700여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관광객들은 곧장 부산 시내 면세점, 백화점, 해운대 등 관광 명소로 달려 갔다. 9일 오후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출발하기까지 크루즈 관광객들은 부산에서 한껏 기분을 냈다. 해양수산부는 이들이 한나절 만에 쇼핑과 관광비로 100만원 안팎을 쓴 것으로 추정했다.

이날 새벽 퀀텀오브더씨즈호가 관광객을 내린 곳은 크루즈전용터미널인 부산국제크루즈터미널(영도항)이 아니다. 컨테이너가 산더미처럼 쌓인 부산 감만 부두였다. 부산항에 초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할 만한 곳이 감만 부두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도항은 15만톤이 넘는 배를 댈 수 없다. 부산항대교는 야경은 멋지지만 높이가 낮아 초대형 크루즈선이 통과할 수 없다.

외국의 초대형 크루즈선이 한꺼번에 관광객 수천명을 싣고 부산과 제주를 찾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선 크루즈선이 정박할 만한 변변한 항구를 찾기 어렵다.

이제 막 출발선에 선 한국 크루즈 산업 인프라의 남루한 현주소다. 관광업계 관계자는 “해외 관광객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준비 상태를 보면 대박 기회를 놓칠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 “한국에는 초호화 크루즈선이 정박할 항구가 없어"

부산 영도항은 퀀텀오브더씨즈호처럼 선체 높이가 60미터를 넘는 배는 정박이 불가능하다. 초대형 크루즈선이 부산항대교를 통과할 수 없다.

부산항대교(위)와 감만부두(아래)

항만 정비 사업을 추진하는 정부가 크루즈선의 대형화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세계 최대 크루즈선인 오아시스오브더씨즈호는 22만톤급이다. 영도항은 최대 15만톤급 선박까지만 정박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크루즈선의 대형화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현재 부산의 항만 시설로는 외국의 고급 크루즈 관광객을 유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상기 해양수산부 해운정책과 사무관은 “한국 크루즈 산업이 초기라 대응이 늦은 점은 있다”며 “영도항을 22만톤급까지 증설하는 등 관련 시설 증·개축에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항구의 입지도 문제다. 우리나라 크루즈 관광은 사실상 여행사가 주도하고 있다. 여행사들은 부산 시내까지 자동차로 1시간이나 걸리는 영도항 정박을 꺼린다.

영도항에서 부산 시내를 오갈 경우 터미널 입국 수속, 출국 수속, 왕복 이동 거리만 따져도 5~6시간이 족히 걸린다.

관광객들이 쇼핑할 시간도 부족하다. 전남 여수항은 국내 최적의 크루즈 항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쇼핑 시설 부족으로 여행사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여객터미널과 달리 컨테이너 부두는 입·출국 수속을 따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크루즈 업계 관계자는 “감만 부두에 배가 정박하면 외국 관광객이 한국에 대해 갖는 첫 인상은 산더미 같이 쌓인 컨테이너 더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진희 디자이너

◆ 국적 크루즈사 설립됐지만 갈길 험난

유일한 국적 크루즈 회사인 팬스타라이너스와 현대상선은 작년 12월 국적크루즈법인 코리아크루즈라인을 설립했다. 2013년 초 하모니크루즈가 경영난으로 크루즈 운항에서 철수한 이후 국내 크루즈 업계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코리아크루즈라인은 2017년 10만톤급 크루즈선을 띄울 계획이다.

크루즈 업계는 현대상선의 앞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현재 적자 늪에 빠져 대대적인 구조조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업계 전문가는 “현대상선은 금강산 관광을 이끌었던 경험과 노하우 때문에 사업자로 선정된 것으로 안다”며 “현대상선이 유동성 위기만 넘기면 크루즈 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로얄캐리비안의 크루즈 여객선 퀀텀오브더씨즈호

"국내 관광객 10만명은 돼야 크루즈 관광 활성화"

한국 최초의 국적크루즈선 클럽하모니호는 2012년 부산을 모항으로 취항했다. 하지만 실적 악화를 이기지 못하고 2013년 1월 닻을 내렸다. 취항 전 마케팅 부족 등이 이유였다.

작년 메르스 사태 때 외국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한국 방문을 취소했다. 수백명에서 수천명까지 실은 해외 크루즈선이 잇따라 부산을 지나쳤다. 영세한 규모의 여행사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미국 로얄캐리비안의 오아시스오브더씨즈호에 탄 관광객들이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국내 관광 산업의 외국인 관광객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광 산업이 덩치를 키우고 내실을 다질려면 국내 수요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수부가 추산한 2015년 국내 크루즈 관광객은 3만명 수준이다. 연간 10만명은 넘어야 국내 크루즈 산업 활성화가 가능하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해수부 관계자는 “2020년까지 크루즈 인구 2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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