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미국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이 애플의 도움 없이 스마트폰 '아이폰5c'의 잠금 암호를 푸는 데 성공했다고 밝힌 직후, 일본의 한 중견기업 주가가 가격 제한폭까지 뛰었다. 파친코 기계를 제조하는 일본 선전자다.
이 회사 주가는 미국 FBI와 애플 간 공방이 치열했던 22일 736엔(약 7580원)이었다가 급등을 거듭해 30일엔 장중 최고가 1270엔(1만3000원)을 찍었다. 무려 72.5%나 오른 것이다. 선전자의 자(子)회사인 이스라엘 '셀레브라이트'가 FBI를 도와 애플의 아이폰 암호를 해독한 주인공이란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애플이 만든 방패(암호)를 뚫은 창(해독 기술)의 가치가 주가에 반영된 것이다.
선전자와 셀레브라이트를 잇는 고리는 야마구치 마사노리(山口正則·67)씨다. 그는 선전자가 2007년 셀레브라이트를 1750만달러(약 200억원)에 인수하면서 셀레브라이트의 최고경영자(CEO·회장)에 올랐다. 그는 "인수 당시 직원 수 40명에 불과했던 셀레브라이트는 지금 매출과 영업이익, 직원수 등 모든 부문에서 10~20배씩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회사의 성공을 인정받아, 2013년 모(母)회사 선전자의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파친코 기업에서 최고 보안기술 업체로 변신한 일본 선전자
선전자는 일본 아이치현(縣)에서 1971년 파친코용 전자 부품 제조사로 설립됐다. 마에다 마사미(前田昌美) 창업자는 "앞으로 일본은 전자제품이 먹여 살린다"며 창업했다. 야마구치 사장은 72년 아이치공업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 회사에 들어왔다. 선전자는 일본의 파친코 시장과 함께 승승장구했고 2001년엔 도쿄 증시에 상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경기 침체로 파친코 시장에도 불황이 왔다. 야마구치 사장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파친코는 지속적인 수익을 내는 산업이지만 일본 밖으로 확장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야마구치 사장은 9년 전 마에다 창업자와 함께 해외 진출을 위해 인수할 미국 기술 벤처를 찾다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훼손된 데이터를 복원해 분석하는 것) 기술을 가진 이스라엘 기업 셀레브라이트를 만났다. 그리고 일본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회사를 인수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자신이 CEO까지 맡았다. 셀레브라이트는 현재 미국·독일·영국·아랍·브라질 등 전 세계 100개 국가의 정보기관과 군·경찰에 '모바일 보안 기기'를 판매한다. 대당 가격은 100만엔(약 1000만원)이 넘는다. 미국의 FBI와 CIA 등 정보기관에 공급하는 보안 시장에서 이 회사의 점유율은 55%다.
선전자는 더 이상 파친코 기업이 아니다. 전체 매출(273억5000만엔·약 2820억원) 중 모바일 보안 분야가 절반인 136억3000만엔(약 1400억원)이다. 야마구치 사장은 최근 1~2년 새 이스라엘 기업 3개를 더 샀다. 모바일 결제 기술업체인 셀로맷이스라엘, 가상현실 기술업체 인피니티 에그멘티브 리얼리티, 기계 간 자동 통신(M2M) 기술업체 백소프트 등이다. 최첨단 기술 기업만 골라 인수했다. 부동산 등 재테크에 곁눈질 한번 안 했다.
◇"이스라엘의 DNA를 일본에 심겠다"
야마구치 사장은 모(母)회사인 선전자에서도 이스라엘의 창의 문화를 접목시키는 데 심혈을 쏟고 있다. 그는 일본 특유의 수직 문화를 깨기 위해 '대단한 회의'라는 이름의 독특한 회의도 만들었다. 중견간부들이 참석하는 '대단한 회의'에서는 과제에 대해 각자 의견을 종이에 써 제출하고 독창적인 의견을 낸 참석자에게만 발언권을 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윗사람과 주변의 의견에 적당히 맞추는 게 미덕(美德)인 일본식 기업 문화를 깨겠다는 것이다. 서강대 정옥현 교수는 "미래에 주목받을 신기술을 예측해 앞서가는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선전자의 전략은 우리 기업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