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는 지난해 96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1968년 창사 후 47년만의 첫 적자였다. 그래서 2015년을 결산하는 주주총회에서는 경영진에 대한 주주들의 강한 질책이 예상됐다. 하지만 3월11일 열린 주총에서 주주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적자 재무제표'가 첫 번째 안건으로 상정되자 회사가 심어 놓은 주총꾼이 손을 들어 "적자를 냈지만 재무제표 안건을 통과시킬 것을 요청한다"며 바람을 잡았고, 여기저기서 재청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권오준 회장은 때를 놓치지 않고 의사봉을 두드렸고, 포스코 역사상 첫 적자를 낸 경영진은 주주들의 질책 한마디 듣지 않고 책임을 모면했다.

70억원의 이사 보수 안건도 한 푼 깎이지 않고 통과됐다. "지난해 포스코 주가가 40%나 떨어져 주주는 큰 손해를 봤는데 이사 보수는 왜 내리지 않느냐"는 항의는 "바쁜데 빨리 통과시키자"는 주총꾼의 목소리에 묻혔다. 보다 못한 소액주주가 일어나 "사전에 각본을 짜 놓은 듯이 형식적으로 주총을 진행하는데, 포스코의 위상에 맞지 않은 구시대적 행태"라고 지적했지만, 권 회장은 "내년 주총에는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며 피해갔다.

의류업체 BYC의 소액주주협의회는 올해 주총에서 상근감사 선임을 요구했다. 비합리적인 경영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경영진은 소액주주가 요구한 상근감사를 두는 대신 별도의 감사위원회를 신설하도록 정관을 변경해 버렸다. 감사위원회는 자산이 2조원 이상인 상장 기업만 설치 의무가 있어, 자산이 1조원을 밑도는 BYC는 둘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경영진이 정관을 변경해 감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한 것은 소액주주들이 요구한 상근 감사 선임을 막아, 경영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꼼수라는 평가다.

주총 시즌이 지나갔다. 올해 주총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예년과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주총은 준비된 각본대로 진행됐고, 1시간 안에 끝났다. 10여 년 전 주총처럼 "당신, 주식 몇 주나 갖고 있어?"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소액주주는 여전히 무시당했다.

우선 기업들은 올해도 3월의 금요일 오전에 주총을 몰아서 개최했다. 코스피, 코스닥 전체 상장회사 1933개 중 3월에 주총을 한 기업은 모두 1581개였다. 이 중 금요일인 11일, 18일, 25일에 개최한 기업은 1330개로 84%에 달했다. 주총이 쏠리는 날짜를 '슈퍼 주총 데이'라고 근사하게 부르지만, 실제로는 '주총 일자 담합'의 성격이 강하다.

주총 일자 담합은 주주의 참석을 제한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기업 주총이 2~3개 날짜에 몰리면 여러 회사의 주식을 가진 투자자들은 모든 회사의 주총에 참석할 수 없고 발언할 수도 없다. 금요일에 몰리는 것은 부끄러운 주총의 모습이 가급적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신문의 경우 다음날(토요일) 지면이 적어 여러 기업의 주총 소식을 자세하게 보도하기 힘들다. 인터넷 뉴스 매체도 수백 개 기업이 한꺼번에 개최하는 주총을 모두 취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대만은 주총이 특정한 날에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주총 일자 쿼터제'를 실시 중이다. 감독 기관이 사전에 기업의 주총 희망 날짜를 접수해, 특정 일자에 과도하게 몰리면 다른 날짜로 분산한다. 한국도 이런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주총 시간이 너무 짧은 것도 문제다. 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1년간 열린 상장회사 주총의 평균 시간은 33.1분에 불과했다. 개회 선언과 출석 주식수 보고, 의장 인사, 감사보고, 영업보고를 마치고, 재무제표 승인, 사내외이사 선임, 정관 변경, 이사보수한도 승인 등 주총에 상정된 모든 안건을 논의하고 통과시키는데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30분 주총'은 특히 은행권에서 두드러진다. 올해 신한지주, KB금융, 하나금융지주,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 주요 은행의 주총은 약속한 듯이 모두 30분 안에 끝났다. 경영진이 동원한 것으로 보이는 주주가 "의장의 발언에 동의한다"고 나서면 박수로 안건을 추인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소액주주보다 의결권이 큰 기관투자자들이 주총에서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것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기관투자자는 돈을 맡긴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주총에서 냉정하게 찬반투표를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기업이 상정한 안건에 무조건 찬성표를 던져왔다. '거수기 투표' 성향은 특히 민간 기관투자자에게서 두드러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자산운용사와 보험사 등 민간 기관투자자가 지난해 코스피 상장회사 주총에서 찬성표를 던진 비율은 98.3%에 달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스튜어드십 코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제도는 '사외이사 후보가 3개 이상 기업에 겸직하면 선임을 반대한다'거나 '배당성향은 5%이상이어야 찬성한다'는 것처럼 기관투자자가 사전에 주총 안건에 대한 찬반 투표 지침을 마련해 공개하고 실제 주총에서 지침에 따라 투표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가 지난해 의결권 행사지침 도입을 추진했으나 대기업 계열 자산운용사들의 반대로 중단됐다. 대기업 주총에서 기관투자자들이 반대표를 던지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자투표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도 과제다. 전자투표는 주주가 주총장에 가지 않고도 의결원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로 2010년 도입됐다. 전자투표를 도입한다고 한국예탁결제원과 계약을 체결한 상장기업은 773개사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로 주총에서 전자투표를 한 주주의 비율은 지난해 전체 상장기업 주주의 0.2%에 불과했다. 기업들이 전자투표제를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고, 실시하더라도 주주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총은 '자본주의 우드스탁'으로 불린다. 미국의 록음악 행사인 우드스탁처럼 축제 분위기에서 열린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주총이 열리는 4월 말 5월 초 버크셔 해서웨이 본사가 있는 미국 네브라스카주 소도시 오마하에는 4만여명의 주주와 가족이 찾아와 2박3일 동안 즐기며 마음껏 발언하고 고급 투자 정보도 얻어간다.

역사가 짧고 문화가 다른 한국 기업에서 축제 수준의 주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주주들이 주총에 참석해 발언하고 투표할 권리는 보장해야 한다. 주식회사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말한다. 주식회사의 최고 의결기구인 주총이 제 기능을 해서 한국도 이제 성숙한 자본주의를 꽃피우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