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보았다.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턴 카톨릭 교회에서 30여 년 간 벌어진 아동 성추행 스캔들을 파헤쳐 퓰리처상을 수상한 '보스턴 글로브' 탐사 보도팀인 '스포트라이트팀' 기자들의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사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참고로 기자들은 기자들이 출연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형사와 검사, 조폭과 살인자가 등장하는 사회 고발 영화에서, 기자는 기껏해야 속물적인 기회주의자나 먹이 사슬에서 삐져나온 하이에나처럼 등장할 뿐. 기자가 주인공이 되는 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사건의 전달자, 파장의 증폭자이되,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편의 영화가 가장 고전적인 방식으로 언론의 사명과 기자의 역할을 되묻고 있다. 대중들은 영화 속 기자들이 보여주는 취재 방식과 직업 윤리에 격렬하게 반응한다(25만 명이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2001년, 경영난을 겪던 언론사 '보스턴 글로브'에 새 편집국장이 부임하면서 시작한다. "좋은 기자를 잃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최고의 기자를 잃는 것은 환장할 일이다." 퇴임 국장을 향한 헌사와 함께 왁자지껄한 환송식이 끝나면, 새로 온 신임 국장이 편집 회의를 연다.

'마이애미 헤럴드'에 있다가 막 부임한 편집국장 마티 배런의 메시지는 심플하다. "독자들에게 제일 필요한 걸 제공해야 한다." 오늘날 언론이 자의적으로 분해해버린 '독자' '필요' '제공'이란 낱말의 원론에 비춘 '스포트라이트'는 이후 그것이 신임 국장의 입에 발린 '허세'가 아니라 단호한 '의지'로 이어지면서 제대로된 빛을 발한다.

편집회의 장면. 책상에 기대 있는 '보스턴 글로브'의 편집부국장 벤 브래들리 주니어(존 슬래터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터뜨렸을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의 아들이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팀은 배런 국장의 지시를 받아들여 카톨릭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조사한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은 자신이 어떤 집단이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스턴글로브' 탐사보도팀 기자들의 모습은 현실적이되, 상투적이지 않다. 그 상투적이지 않은 기자의 정석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그들은 질문한다.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고, 가해자인 신부를 찾아 "그 일이 사실이냐?"고, 변호사를 찾아 "합의문은 어디 있느냐?"고. 그리고 "이런 걸 보도하는 게 언론입니까?"라는 물음에도 질문한다. "그럼, 이런 걸 보도하지 않는 게 언론입니까?"라고.

둘째, 그들은 기록한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수첩을 꺼내서. 녹음이 아닌 기록이다. 결코 법정 '증거'가 될 수 없지만, 한 방의 증거보다 무서운 논리적 압력으로 추론과 결론을 '기사화' 시킬 수 있는 '무기'로서의 기록 말이다.

셋째, 그들은 추적한다. 그들이 추적하는 것은 한 인물의 비리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수백 권이 넘는 신부 인명등록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80명이 넘는 '문제' 신부를 전부 찾아내고, 이동 경로를 추적한다.

넷째, 그들은 협업한다. 팀장은 문제를 덮으려는 지역 사회 거물 변호사와 학교를 압박하고, 여기자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찾아가며, 공격적인 남자 기자는 판사와 인권 변호사를 상대한다. 뉴스룸은 수사본부 상황실처럼 일사분란하다. 사장, 국장, 팀장, 기자의 역할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모습은 언론사 아닌 그 어떤 조직에 견주어도 비현실적이리만큼 이상적이다.

다섯째, 그들은 인내한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낸 기자가 일단 터뜨리자고 하자, 편집국장이 말한다. "신부 말고 교회!" 낌새를 차린 타사에 특종을 뺐길까 보도를 채근하자 탐사보도팀장이 저지한다. "몇몇의 일탈로 꼬리 자르게 두지 말고, 시스템을 고발해야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을 놀래키는 '특종'이 아니라, 비상식적으로 묵인된 특권의 박탈이다. 이 '인내'는 영화에서 가장 초현실적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특종'이야말로 기자의 야생 본능이기 때문이다. 1년 간 준비해서 이듬해 1년 간 600여건의 기사를 내보낸 대가로 그들은 '특종상'이 아니라 공공 보도 부문 퓰리처상(대상에 해당됨)을 수상한다.

여섯 째, 그들은 반성한다. 이미 5년 전, 제보를 받고도 이 사건을 묵인했던 탐사보도팀장이 과거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자 편집국장 마티 배런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린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가요. 갑자기 불을 켜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

화면은 '스포트라이트'의 보도가 나간 다음날, 쏟아지는 제보 전화를 받으며 암전된다. 영화는 절정에서 막을 내리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진 현실은 남루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보스턴 글로브'의 경영진은 기자들을 감원하거나 연봉을 삭감했고, 결국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가 '뉴욕타임스'로부터 이 신문사를 헐값에 사들였다. 배런 편집국장은 2013년 '워싱턴 포스트'로 옮겨 편집국장을 맡았다. 워싱턴포스트도 2013년 디지털 기업인 아마존에 인수합병됐다.

탐사보도팀의 팀플레이는 형사들의 팀웍을 연상시킨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언론을 둘러싼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종이 신문 유료 구독자가 줄면서 언론사 재정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트래픽과 속보 경쟁으로 기자들의 신경은 더욱 예민해진다. SNS는 기록적인 속보와 분방한 앵글로 유사 언론 역할을 자처하는데, 인터넷 바다 위엔 변별력 없는 기사가 산업 폐기물처럼 떠다닌다.

어뷰징(abusing, 비슷한 기사 제목을 지속적으로 전송해서 포털 사이트의 상단을 점유하는 행위)과 특종 경쟁에 골머리를 앓는 현대의 기자들에게 '완전 원고(기계적 객관성이 아니라)'와 '협업'을 기반으로 하는 '보스턴 글로브'의 1년 여 간의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는 '영화 속 신기루'처럼 여겨질 수 있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끊임없이 취재하고 쓴다.

때로는 기계처럼, 때로는 기계와 경쟁하며.

여전히 현재도 미래도 언론 환경은 예측불가능하고,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인 마틴 배런조차 국제온라인저널리즘 심포지엄에서 "낙관주의 말고는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7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기자 출신 소설가 조지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1946년)'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 즉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 온다… 내가 맥없는 글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였다."

고루하지만 기자가 기자다울 수 있는 힘은, '불의를 감지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기자들이 일깨운 것은 바로 그 '기자의 원초적 본능'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고, 학대하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다"라는 인권 변호사의 항변과 더불어, "이런 걸 보도하지 않는 게 언론입니까?"라는 질문은 그래서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