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강북 지점에서 예·적금 등 수신 업무를 주로 맡아오던 정모 계장은 지난 달 벼락치기로 공부한 '파생상품 투자권유 자문인력' 시험 결과를 전전긍긍 기다리고 있다. 만약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오는 14일 출시되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의 판매 자격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ISA는 주가연계증권(ELS) 등과 같은 파생상품을 담게 되는데, 파생상품은 시험을 통과한 전문가만 팔 수 있다.
정 계장은 "다행히 파생상품을 처음 접해본 사람도 쉽게 합격할 수 있을 만큼 시험이 쉬운 편이었다"며 "ISA 출시를 앞두고 은행 간 사전 경쟁이 치열해져 대다수 은행원이 ISA 영업에 동원되다 보니 벼락치기로 공부해 자격증을 따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ISA 출시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금융회사들이 판매 인력은 물론, 자산운용 전문가 등과 같은 인프라조차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금융회사들이 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아 자칫 '만능 재테크 통장'으로 꼽히며 데뷔하는 ISA가 '속빈 강정'에 그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 벼락치기로 ISA 판매 준비하는 은행원들
ISA는 예·적금은 물론, 펀드와 ELS, 리츠(REITs), 환매조권부증권(RP) 등 다양한 상품을 편입할 수 있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같은 종류의 금융상품 편입 비중은 최대 30%, 같은 상품군 편입 비중은 최대 50%로 제한했다. 따라서 ISA에는 예·적금뿐 아니라 파생상품과 같은 고위험 상품도 함께 포트폴리오에 담아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주식이나 채권 등을 기초자산으로 해서 만드는 파생상품은 '제로섬 게임(한쪽이 이익을 보면 다른 한쪽을 손해를 보는 게임)' 형식으로 설계되는 상품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판매자의 설계 의도나 구매자의 투자 성향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은행권에서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설명할 전문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현재 '파생투자권유자문인력' 자격증을 갖춘 은행 직원은 약 3만8000명으로 전체 은행 직원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자격증은 파생상품 판매를 위한 최소 필수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상당수가 기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금투협은 파생상품 자격증을 갖춘 직원이 부족하다는 은행권 요청에 따라 지난 달 28일 예정에 없던 특별 시험까지 편성했다. 당초 올해 시험은 3월 27일, 6월 11일, 11월 6일 등 3차례만 예정돼 있었지만, ISA 때문에 갑작스럽게 특별시험 일정이 추가됐다. 특별시험에는 1만명 넘는 사람들이 응시했다.
◆ 수수료는 운용 성과와 무관…"수익률보단 판매 실적"
ISA는 판매 인력만 급조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금융회사들은 ISA 출시를 앞두고 고객 선점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수수료와 같은 중요한 상품 구조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대다수 금융사들은 ISA에 담는 개별 금융상품별로 판매 수수료를 부과하거나 혹은 처음부터 고객이 맡긴 돈 중 일부를 관리비 명목으로 떼가는 정률 보수를 부과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정률 보수로 수수료를 부과하면 고객이 손해를 보더라도 수수료 내야 하기 때문에 불리할 수 있다.
가령 투자자가 ISA에 1000만원을 투자해 2%의 손해가 발생하고 정률 보수가 1%라면 투자자가 잃게 되는 돈은 20만원이 아니라 수수료 1%(10만원)를 더한 30만원이 된다. 따라서 실제 손실률은 2%에서 3%로 늘어나게 된다.
판매 수수료는 '고수익·고위험' 상품일수록 높은 수수료가 매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A은행은 예·적금에 0.1~0.2%, 펀드에 0.3~0.5%, 파생결합증권에 0.7~1%의 수수료를 매기는 것을 검토 중이다. 예·적금에 붙는 수수료는 원래 내야 하는 이자소득세(15.4%)보다는 적은 수준이지만,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인 파생상품의 수수료 수준이 높은 편이라 실질 수익률은 큰 차이가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은행들이 양적 성장을 중시하는 성과 지표(KPI)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어 고객 수익률보다는 판매 실적에 더 치중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일부 은행들은 지난해부터 고객 수익률을 KPI에 반영하기 시작했지만, 전체 점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 안팎에 불과하다. 영업 현장에선 아직 운용 성과보다는 본점이 정해준 판매 실적 달성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고객 입장에서 현재까지는 자신의 금융상품을 전체적인 포트폴리오 안에서 관리한다는 개념이 별로 없지만, ISA가 출시되면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며 "ISA 성공 열쇠는 교육, 채용, 시스템 정비 등을 통해 은행들의 판매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에 달렸다"고 말했다.